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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2월4일


성 요셉 레오네사


ST. JOSEPH OF LEONISSA - CAPUCHIN


San Giuseppe (Desideri) da Leonessa


8 January 1556 at Leonissa, Umbria, Italy as Eufranio -


Saturday 4 February 1612 at Umbria, Italy of cancer and post-operative problems


from surgery for that cancer


Beatified:22 June 1737 by Pope Clement XII


Canonized:29 June 1746 by Pope Benedict XIV



움브리아의 레오네사 출신인 그는 18세 떄에 카프친회원으로 서약한 뒤, 요셉이란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순종적이었으며 영웅적으로 극기생활을 하였으니,


한번은 3주간 동안이나 물도 빵도 없이 지낸적이 있었다.



그는 항상 손에 십자가를 들고 설교했고, 끓어오르는 열정을 폭발시키는 듯한 자세로 열변을 토하였다.


1587년, 그는 터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페라로 파견되어 수많은 배교자들을 회두시키고,


모슬렘인들을 상대로 설교하였으므로, 두차례나 투옥되었다.


두번째의 투옥에서 그는 잔인한 죽음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556년 북 이탈리아의 밀라노 시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계승하는 카푸친 수도원의 수사


페르토의 요셉이라고 하는 한 사제가 서거했다.


이사람은 유럽에 상당히 알려져 있는 40시간의 성체조배라는 신심을 처음 주창한 분으로서 유명하지만,


그것은 그 이름과 같이 신자가 성당을 방문해 40시간 낮이나 밤이나 그침없이


계속 제대 위에 모신 성체께 대해 기도를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같은 해에 움브리아의 아시시에 가까운 레오니사라는 마을에


몇 년 후에 이 40시간의 성체조배의 신심을 성대하게 한


성인이 태어났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잇을 것이다.



그는 데시데디의 요한이라는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백작(伯爵)의 가정에서 태어나


세례 때에는 오이플라니오라는 본명으로 불렸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비델보 대학 교수인 백부의 슬하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천재적 두뇌는 오래지 않아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다.


백부는 장래 어떤 귀족의 딸과 결혼시키려고 했지만,


본인은 학생 시대에 여러 가지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보존해 온 정결한 마음 그대로 세속적 명예나 가정생활을 원하는 기색은 추호도 없으므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립한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서


요셉이라는 수도명을 받고 남몰래 착복식까지 다 치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백부는 자기의 소망이 다 일그러진 것에 대해


대단히 분노해 폭력을 써서라도 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했으나,


요셉은 시종일관 수도원에 끝까지 머물러 있으면서 완덕의 길을 걸을 결심을 하고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본받아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행을 감행하고, 밤낮 제대앞에 부복해 열렬한 기도를 바치는 등


다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버리는 데 더욱 진력했다.



이와 같이 세라핌보다도 못지 않은 사랑을 지니고 있던 그는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본래부터 원하던 바이고,


1587년 커푸찬회 총장으로 부터 터키로 가라는 명령을 받자마자 기뻐하며


이교의 나라에 가서 콘스탄티노플에 노예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로하며 구출해 주었을 뿐아니라,


회교에 빠져 있는 터키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고,


특히 여러가지 환난에 못 이겨 배교한 신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며


개종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요셉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터키의 황제 멜렉 엘 가미르에게 복음을 전한


성 프란치스코를 모방하려고 어느 날 그 성을 방문했을때 ,


그는 즉시 수위병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후에 무서운 형벌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이 형벌은 날카로운 갈퀴로 그의 왼손과 오른 다리를 끼어서 공중에 매달고


40시간 동안이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33세였던 요셉은 예수께서 수난을 받으셨던 나이와 같은 나이에


주님과 같은 형벌을 받고 순교하게되는 영광을 즐거워하며


그러한 은혜를 내려 주신 하느님께 상처가 혹독히 아픈 중에서도 찬미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형리들은 보다 더 그를 괴롭히기 위해 그를 달아매고 그 밑에 불을 피워 놓고 그를 그을리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올라올 때 성인의 호흡은 시시각각으로 가빠져서 이제는 최후라고 각오하고 있었으나


그때 황제는 사형을 면제하고 국외로 추방하기로 했다.



그 후 요셉은 고국에 돌아와서 이번에는 움브리아 지방을 순회하면서


불을 토할 듯한 열렬한 설교로 냉담했던 신자들의 마음을 다시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게 했다.


그 설교는 하루에 적어도 서너 번 씩 하고 어떤 때는 더 많이 했으므로


그로 말미암아 개종한 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 지 모를 정도이다.


이를 보더라도 그의 활동이 얼마나 눈부시고 또한 유효했던가를 알수가 있다.



사람들을 냉담과 죄악에서 구출하기 위해


그가 40시간의 성체조배의 신심을 보급하는데 전력을 다한 것은 이때였다.


그는 자신이 40시간 형벌을 받은 몸이란 것을 잊지 않고,


그때 자기 마음에 타오른 것과 같은 예수께 대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신심으로써 격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탈리아에서 22년 동안이나 사도적 활동을 계속한 뒤,


요셉은 병상에서 신음하게 되어 수술 받게 되었는데,


수술 중간에 의사가 그의 몸의 움직임을 염려해, 줄로 그의 몸을 수술대에 묶으려고 할 적에


그는 손에 쥐고 있는 십자가를 내 보이면서


"줄보다 이분이 더 강하므로 걱정 없습니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치료도 아무 효과를 보지 못해 1612년 2월 4일을 일기로 그는 평안히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심한 병고 중에서도 항상 하느님께 대한 찬미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전구로 인해 무수한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1746년 그 당시의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요셉 레오니사를 성인품에 올리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카푸친작은형제회 성인들 Capuchin Franciscans: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축일:5월21일(19일),게시판1773번.1891번)
단순성과 기쁨.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1587년.축일:5월18일.게시판1770번.1166번)
만디츠의 성 레오폴드 사제(축일:5월12일,게시판1759번,1890번)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축일:5월11일.게시판1757번)
신앙을 수호하다 순교한 식마린겐의 성 피델리스 사제(축일:4월24일.게시판1727번,1119번)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축일:4월21일.게시판1722번)
성 요셉 레오네사(축일:2월4일.게시판1601번)
꼬를레오네의 성베르나르도 수도자(축일:1월12일(19일),게시판1564번)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축일:10월30일.게시판1444번)
성 세라피노(축일:10월12일.게시판1417번,691번)
캄포로쏘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축일:9월20일(25일)게시판1384번)
오상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축일:9월23일.게시판1379번)
복자 오피다의 베르나르도(축일:8월26일(23일)게시판1334번)
복자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동료순교자(축일:8월7일.게시판1305번)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축일:7월21일.게시판1283번)


니코시아의 성펠릭스 수도자(축일:6월2일.게시판179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가난함을 주소서-임석수 작사.작곡










































JOSEPH OF LEONISSA - CAPUCHIN


Joseph was born into a humble and holy family. We are told that he fasted regularly and that he was drawn to a life of penance. For this reason he was one of the early Capuchins at Assisi in 1573, when he was seventeen, with the primary aim to do penance for the sinners of the world.



His greatest victories were, we are told, over his tongue, his eyes and his imagination. He spoke little and to the point. God enlightened his mind by giving him great humility and a hunger for perfection. Joseph saw that his vocation to religious life was a generous and gratuitous gift of God. Filled with humble gratitude Joseph wanted to show God his love by spreading the faith among the infidels. First, however, obedience was to try him.



His attraction to the contemplative life of the Capuchin satisfied him as a student and a young priest. In obedience he became a preacher and finally was appointed Guardian (Superior) at the friary in Assisi. Joseph slept on boards, wore poor clothes, kept his body in almost continual pain and prayed day and night. Desiring martyrdom Joseph asked and obtained permission to go to Constantinople in 1587 with three companions. The work of these three men among the Christian slaves of the Turks was heroic. Joseph preached to them daily, bound their wounds and changed their attitudes to their suffering. The guards became suspicious of Joseph and thinking him a spy threw him in a dungeon.



After being released Joseph tried to preach to the Sultan, but was arrested, beaten and condemned to die on the gibbet. He was suspended by his right hand and left foot by hooks for three days. A slow fire below him almost choked him. As a large crowd gathered Joseph forgot his torment and preached to them of Christ, but on the third day, apparently quite miraculously he was freed. The saint returned to Italy where he was renowned for his work in the confessional. He became famous as a peacemaker. He continued to do penance and spend long hours in the confessional, despite the cold and heat and preach as many as six sermons a day.



Prayer and penance made Joseph a Capuchin apostle and the Church canonised this in 1745. His feast is celebrated on February 4th.




JOSEPH of Leonissa



Also known as


Eufranio; Joseph Desideri


Memorial


4 February


Profile


Third of eight children born to John Desideri, a wool merchant, and Serafina Paolini. His parents died when the boy was 12 years old, and he was raised and educated by his uncle Battista Desideri, a teacher in Viterbo. Desideri arranged a marriage for Eufranio with a local noble family, but the boy felt a call to religious life. Worry over his vocation, and fear of hurting his uncle, made Eufranio sick; he returned to Leonissa to recover There he met, and was greatly impressed by, a group of Capuchin monks. When Eufranio told his uncle of his desire to join them, Desideri insisted that he continue his studies.



Eufranio agreed, and moved to Spoleto to do so, but kept in contact with the monks. Following a novitiate year in which the monks did everything to test and dissuade the young man, he joined the Capuchin Franciscan on 8 January 1573 at age 18, taking the religious name Joseph. Suffered through several self-imposed austerities including fasting three days a week and sleeping on bare boards. Ordained at Amelia on 24 September 1580. Preacher throughout the regions of Umbria, Lazio and Abruzzi. Once converted an entire band of 50 highway bandits, who then showed up as a group for his Lent sermons.



Missionary to Muslim Pera near Constantinople (modern Istanbul, Turkey), receiving his commision on 1 August 1587. Chaplain for 4,000 Christian galley slaves. Often offered to take the place of some slave who was being worked to death, but the authorities never accepted. Ministering to prisoners in a remote camp, he got home late, and was forced to sleep outside the walls of his assigned area; spent a month in jail, charged as a spy for being in the wrong place. Preached to any who would listen, brought lapsed Christians back to the Church and converted Muslims. Worked with prisoners during a plague outbreak.



Joseph repeatedly sought an audience with the Sultan; he planned to ask for a decree of religious freedom. His forceful methods led to his being arrested and condemned to death for trespassing on royal property. Hung by hooks over a smoky fire for three days, he was freed (legend says by an angel), and returned to Italy, in autumn 1589.



There he resumed his vocation of wandering preacher to small villages throughout the country. Preached to and for the poor, and spread the teachings of the Council of Trent. Helped establish hospitals, homeless shelters, and food banks. Ministered in prisons, to the sick, and the poor. With his crucifix in hand, he would wade into gang fights and brawls, praying, and preaching peace and good sense.


Born


8 January 1556 at Leonissa, Umbria, Italy as Eufranio


Died


Saturday 4 February 1612 at Umbria, Italy of cancer and post-operative problems from surgery for that cancer


Beatified


22 June 1737 by Pope Clement XII


Canonized


29 June 1746 by Pope Benedict XIV


Representation


with Saint Fidelis of Sigmaringen



Readings


Every Christian must be a living book wherein one can read the teaching of the gospel. This is what Saint Paul says to the Corinthians, ’Clearly you are a letter of Christ which I have delivered, a letter written not with ink, but by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flesh in the heart’ (2 Corinthians 3:3). Our heart is the parchment; through my ministry the Holy Spirit is the writer because ’my tongue is nimble as the pen of a skillful scribe’(Psalms 45:2).



- from a sermon by Saint Joseph of Leonissa





Joseph of Leonissa, OFM Cap. (RM)


Born in Leonissa near Otricoli in 1556; died in Italy in February 4, 1612; beatified in 1737 by Clement XII; canonized by Benedict XIV in 1745. At age 18, Eufranius professed himself as a Capuchin and took the name Joseph. He was always mild, humble, chaste, charitable, obedient, patient, and penitential to a heroic degree. With the utmost fervor and on the most perfect motive he endeavored to glorify God in all his actions.


Three days each week he fasted on bread and water and passed entire Lenten seasons in the same manner. His bed was hard boards, with the trunk of a vine as his pillow. He found joy in chastisement and humiliations, identifying himself with the sufferings of Jesus. He looked upon himself as the basest of sinners, and said that God indeed, by His infinite mercy, had preserved him from grievous crimes, but that by his sloth, ingratitude, and infidelity to the divine grace, he deserved to have been abandoned by God. The sufferings of Christ were his favorite meditations. He usually preached with a crucifix in his hands and the fire of the Holy Spirit in his words.



In 1587, he was sent to Turkey as a missioner, primarily to tend to the Christian galley-slaves. He contracted the pestilence but recovered. He converted many apostates, one of whom was a pasha. By preaching the faith to the Islamics, he incurred the wrath of the Turkish law and was twice imprisoned and tortured. The second time he was condemned to death. He did not die, so he was banished instead.



Upon his return to Italy, he continued to preach. To complete his sacrifice, he suffered much at the end of his life from a painful cancer. He underwent two operations (without anesthesia) without the least groan or complaint, except the repetition of, "Holy Mary, pray for us miserable, afflicted sinners." When someone said before the operation that he ought to be restrained, he pointed to the crucifix in his hand and said, "This is the strongest band; this will hold me unmoved better than any cords could do." The operation was unsuccessful and he died at age 58. Many miracles were reported in the acts of his beatification (Benedictines, Husenbeth).



In art, Saint Joseph is always shown with Saint Fidelis of Sigmaringen, OFM Cap. Both are old Capuchins who were canonized on the same day. Saint Fidelis tramples on Heresy and an angel carries the palm of martyrdom (Roeder).






FIDELIS of Sigmaringen



Also known as


the poor man’s lawyer; Mark Rey


Memorial


24 April


Profile


Lawyer and philosophy teacher. Disgusted by the greed, corruption, and lack of interest in justice by his fellow lawyers, Mark Rey abandoned the law, became a priest, became a Franciscan friar with his brother George, changed his name to Fidelis, and gave away his wordly wealth to poor people in general and poor seminarians in particular. He was served his friary as guardian, and worked in epidemics, especially healing soldiers. He led a group of Capuchins to preach to Calvinists and Zwinglians in Switzerland. The success of this work, and lack of violence suffered by mission was attributed to Fidelis spending his nights in prayer. He was, however, eventually martyred for his preaching.


Born


1577 at Sigmaringen, Hohenzollern, Germany as Mark Rey


Died


24 April 1622 at Grusch, Grisons, Switzerland


Beatified


24 March 1729 by Pope Benedict XIII


Canonized


29 June 1746 by Pope Benedict XIV


Representation


with a club set with spikes; with a whirlbat; heretics; with Saint Joseph of Leonissa; trampling on the word heresy; with an angel carrying a palm of martyrdom; the Morning 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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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s


Woe to me if I should prove myself but a halfhearted soldier in the service of my thorn-crowned Captain.



-Saint Fidelis












San Giuseppe (Desideri) da Leonessa



4 febbraio




Leonessa, Rieti, 8 gennaio 1556 ? Amatrice, 4 febbraio 1612



Al secolo Giuseppe Desideri, entrato nell’Ordine dei Frati Cappuccini vi condusse una vita di grande austerita e fervido lavoro apostolico. Missionario a Costantinopoli, si adopero per confortare e consolare gli schiavi inermi e per convertire lo stesso sultano; venne percio incarcerato e torturato, sfiorando anche il martirio. Tornato in patria vi continuo la sua missione ed attivita di apostolo.





In Leonessa (Rieti) ebbe i natali l’8 gennaio 1556 Eufranio Desideri da Giovanni e Francesca Paolini, di famiglia ricca e appartenente alla nobilta del paese. Il fanciullo perdette, a poca distanza l’uno dall’altro, i genitori e fu accolto dallo zio paterno, Battista, “maestro di umanita” a Viterbo, sotto la cui guida si pote formare un’educazione religiosa e una notevole cultura. Ornato di eccellenti doti, non gli mancarono le prospettive di un ambito matrimonio, ma egli dimostro di avere altre aspirazioni e costantemente rifiuto le proposte caldeggiate dai parenti. Colpito da grave malattia, fu consigliato di ritornare al paese natale dove comincio a frequentare il convento dei Cappuccini e, in occasione di una visita del provinciale dell’Umbria, chiese di essere accolto in religione. Fece il suo noviziato alle Carcerelle di Assisi, vestendo l’abito nel gennaio 1572 e mutando il nome di Eufranio in quello di G. I famigliari cercarono invano di strapparlo al convento, adducendo la necessita di assistenza che avevano le quattro sorelle, ma Giuseppe ai richiami del sangue, preferi la voce di Dio e, trascorso nel fervore l’anno di prova, fu avviato allo studio della filosofia e della teologia. Comincio inoltre a distinguersi in modo particolare per lo spirito di penitenza.


Ordinato sacerdote e nominato predicatore, subito si dedico con entusiasmo a tale ministero, accarezzando in cuor suo il desiderio di andare nelle missioni tra gli infedeli. Proprio in quegli anni, infatti, si profilava una possibile evangelizzazione dei musulmani: due cappuccini erano riusciti a penetrare a Costantinopoli fin dal 1551, seguiti, nel 1583, da alcuni gesuiti. Nel 1587, al capitolo generale dell’Ordine fu trattato il problema delle missioni e il nuovo ministro generale, Girolamo da Polizzi, decise una spedizione per Costantinopoli, che la S. Sede voleva affidata ai Cappuccini. Giuseppe che aveva presentato da anni la domanda non era tra i prescelti; se non che, pote improvvisamente entrare a far parte del gruppo, dovendo sostituire Egidio di S. Maria, che all’ultimo momento non era piu in grado di partire. A Costantinopoli i missionari trovarono alloggio nel quartiere di Pera, ripararono una cadente chiesa e, prima di tutto, cominciarono a svolgere il loro ministero tra gli occidentali cola residenti. A Giuseppe fu affidata, in modo particolare, la cura dei numerosi cristiani tenuti prigionieri dai Turchi e ad essi egli dedico tutto se stesso. Spinto pero dal suo fervore egli avrebbe voluto affrontare direttamente gli infedeli e, con un’audacia a noi oggi incomprensibile, ma spiegabile per quei tempi, con vari stratagemmi cerco di penetrare nel palazzo stesso del sultano Murad III per parlargli. In uno di questi tentativi fu arrestato, imprigionato e condannato alla pena del gancio. Per tre giorni rimase sospeso, con un uncino alla mano destra e uno al piede, ad una trave alta su di un fuoco acceso sopportando anche i dileggi e gli insulti della folla. Indi venne liberato e espulso.


Rientrato in Italia, riprese con rinnovato fervore il ministero della predicazione, accompagnandolo con costanti ed eroici esercizi di penitenza. Si nutriva con pochi legumi, o un po’ di pane macerato nell’acqua; dormiva su due sassi e un sacco di paglia, e continuava nella sua attivita instancabile, arrivando a tenere anche otto prediche la giorno in luoghi diversi e distanti.


Alla sua predicazione diede un carattere popolare, favorendo la pacificazione degli animi e il sollievo dei poveri, istituendo Monti di Pieta e Monti Frumentari, erigendo e riparando ospedali. Dagli Atti del processo di beatificazione risulta che Iddio lo favori del dono dei miracoli, della scrutazione dei cuori, e di particolari grazie di orazione. Nella comunita ebbe l’ufficio di superiore locale e di segretario provinciale.


Dio, che gli aveva risparmiato il martirio, gli riservo per purificazione una grave malattia che richiese un dolorosissimo quanto inefficace intervento. Trasferito nel convento di Amatrice, dove era superiore un suo nipote, Giuseppe si preparo serenamente alla morte che sopraggiunse, accompagnata da miracoli, il 4 febbraio 1612; aveva cinquantasette anni. Il suo venerato corpo, per volonta dei maggiorenti della citta, fu sottoposto ad uno speciale intervento di conservazione e venne inumato nella chiesa conventuale di Amatrice, da dove, nel 1639, fu trasferito alla sua citta natale, dove tuttora si venera.


Fu beatificato da Clemente XII nel 1737 e canonizzato da Benedetto XIV il 29 giugno 1746; la festa liturgica e celebrata dal suo Ordine il 4 febbraio. Si conservano di lui lettere e prediche di cui alcune edite. Iconograficamente, e rappresentato sospeso sul patibolo o nell’atto di predicare.




Autore: Cassiano da Langa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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