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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10월10일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ST.FRANCIS BORGIA


San Francesco Borgia Sacerdote


28 October 1510 at Gandia, Valencia, Spain


-30 September 1572 at Ferrara;


relics translated to the Jesuit church in Madrid, Spain in 1901


Canonized:20 June 1670 by Pope Clement X


 



 


보르지아가의 스페인계인 간디아 공작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5세 국왕의 딸인 후아나 사이에 난 아들로서,


그는 스페인의 발렌시아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나,


사라고싸의 대주교인 아저씨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28년에는 챨스 5세의 궁중 요원이 되었다.


1529년, 그는 엘아놀 데 카스트로와 결혼하였고,


챨스의 고문으로 10년을 봉직하다가, 부친이 사망했던 1543년부터 간다가의 공작위를 승계하였다.


 


1546년, 그의 아내가 죽은 때, 8명의 자녀들을 남기자, 그는 수도생활을 추구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548년에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려고 결정하였다.


1550년에 그가 로마로 갔다가 다음 해에 자신의 재산 상속 문제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설교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다.


 



 


1554년, 그가 성 이냐시오에 의하여 스페인 예수회의 총대리로 임명되자,


프란치스꼬는 수많은 수도원, 대학, 그리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1565년에는 예수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7년 동안 총장직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에 예수회의 참가를 독려하고,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하였고,


1571년에는 보넬리 추기경을 수행하여 스페인 전역을 선교 여행하다가, 로마로 돌아온 이틀 만에 운명하였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들 때문에, 그는 흔히 제2의 창설자로 불린다.


 


*예수회 www.sogang.ac.kr/~gesukr


*성 이냐시오 축일: 7월31일.게시판1295번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처음엔 국가의 중신으로서 국왕에게 충성을 다해 총독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뒤에는 수도자가 되어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나중에는 예수회의 제3대 총장이 되어 그리스도교회에 대해서도 많은 공로를 세운 성인이다.


 


그는 1510년 스페인의 발렌시아 근교 간디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 지방의 영주(領主)였고, 어머니는 황제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또 어려서부터 경건한 성격으로서, 놀 때도 언제나 전쟁 놀이보다 미사 성제의 흉내를 더 즐기는 편이었다.


19세부터 궁중에 들어가 시종(侍從)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충실한 근무 태도로 말미암아 당시 유럽의 반을 점령하고 있던 황제 가롤로 5세와 그의 황후 이사벨라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마침내 이사벨라의 호의로써


1529년에 그녀의 총애하는 시녀 엘레아놀 데 카스트로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또한 후작(侯爵)의 칭호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이 엘레아놀 부인도 남편 못지 않게 신앙이 깊은 부인이었으므로


그 가정은 늘 봄날처럼 온화하고 16년 동안 5남 3녀를 낳아서 기르는 등 아무 부족함 없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데 뜻밖에 젊은 황후 이사벨라가 서거하여 국장(國葬)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프란치스코가 이의 집행 위원장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가 유해를 그라나다에 있는 황실의 묘소에 매장함에 앞서


옛 풍습대로 관을 열어본 결과, 생존시에는 그렇게도 아름답고 미인이었던 황후의 꽃과 같았던 얼굴이


처참하게 변해져 그의 인생의 무상신속(無常迅速), 세상 사물의 허무함을 깨닫게 할 뿐이었다.


 


여기서 그는 억누를 수 없는 구도심(求道心)을 갖게 되어,


이 세상에서 가치있게 살려면 다만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 뿐이라 생각하고


만일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자신도 반드시 수도원에 들어가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완덕의 길을 걸으려고 굳게 맹세했던 것이었다.


 


훗날 그는 그 날을 회고하면서


“이사벨라 황후의 서거는 실로 나의 영생(靈生)의 시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황제는 프란치스코의 출가 수도(出家修道)의 결심을 재빨리 알아채고


그와 같은 충신을 상실한다는 것은 국가의 일대 손실이라 생각하고,


그 방지책으로 그를 카탈로니아 주(州)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그 당시 황제 대리라 할만한 격식을 갖춘 현직(顯職)이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이미 조금도 현세의 영달을 원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충신이던 그는 황제의 은혜와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이를 받들게 되었던 것이다.


 


카탈로니아 주에는 당시 해적의 습격을 빈번히 받아 양민 중 생명이나 재산을 빼앗기는 이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총독이 되자 경계를 엄중히 하고,


해적들을 체포하면 중형에 처했으므로 얼마 안 되어 그 피해도 아주 자취를 감추게 되어


백성들은 평화를 즐길 수가 있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은덕을 칭찬하는 소리는 사방 곳곳에서 들리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공인(公人)으로서는 황제 대리의 자격으로서 종종 성대하고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고


많은 빈객을 초청하여 그 권위와 세력을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개인적으로는 마치 수도자처럼 검소하고 가난한 생활을 택했다.


그는 그러던 중에도 하루 속히 이 같은 높은 지위를 떠나려는 마음이 간절하여,


총독으로 6년을 지낸 후 황제에게 사직시켜 줄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간신히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은, 다시 그때부터 2년이 지난 후로써,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간디아 영주가 되는 허락을 황제로부터 얻은 1543년에 이르러서였다.


 



 


1546년에는 사랑하는 아내 엘레아놀도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황후의 서거 후 마음먹었던 맹세를 수행할 기회를 얻게 된 프란치스코는,


즉시 예수회의 창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게 입회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허락을 내렸다.


그래도 8명의 자녀가 있고


게다가 광대한 영토와 백성을 소유하고 있던 몸으로서 온갖 사무를 처리하는데도 상당한 시일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그는 교황의 특별한 허가를 얻어


우선 순명과 정결의 서원만을 발하고 청빈 서원은 일체의 사무 처리 후까지 연기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장남에게 자기의 뒤를 상속시키고, 다른 자녀들에게도 각기 뒤처리를 해 준 다음,


1550년 드디어 로마에 가서 이냐시오의 지도하에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정식으로 예수회에 입회하여 숨은 생활을 동경하며


지상의 온갖 영예에 대해서는 언제나 아랑곳없이 지냈다.


또 그는 엄한 고신 극기의 생활을 했고,


게다가 또 지극히 겸손하여 자기 이름에 늘 ‘가난한 죄인’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 교황 율리오 3세가 그를 추기경에 승진시킨다는 소문을 듣자,


겸손한 그는 도리어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피하여 고국인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551년 가롤로 황제의 승인을 얻어 신품 성사를 받아 사제의 자격을 얻었다.


본래 황제 대리의 요직에 있었고 명성을 천하에 떨친 바 있는


프란치스코의 서품은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강론을 들으려는 군중은 사방에서 큰 파도처럼 모여들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첫미사에 참여한 자는 1만 2천명이었고,


그때 그의 손으로 영성체 한 사람은 1240명에 달했다고 한다.


 



 


곧 그는 스페인에 있는 예수회의 관구장에 임명되었다.


예수회는 종래의 수도회와 다소간 다른 점이 있었던 관계로, 이를 오해하고 비난 공격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아니 어떤 때는 가롤로 황제까지도 모함의 말을 듣고 그 수도회에 대해서 의아심을 품은 적도 있었다.


이를 안 프란치스코는 황제를 알현하고 일일이 설명하여 그 오해를 깨끗이 풀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 후 2대 예수회 총장 레이네즈의 초청에 응해


로마로 가서 그를 보좌하며 수도회의 발전에 전력하고 있었는데,


레이네즈가 서거하자 그 뒤를 이어 3대 총장에 추대 선출되었다.


 


프란치스코는 평소 고행에 열심하고 자신을 다스리는데 극히 준엄했으므로,


총장이 되어서도 회원들에 대해서 반드시 엄격했으리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매우 관대하고 아버지와 같은 온정을 베풀고 그 뿐 아니라


각 수도원의 원장들에게도 늘 온순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라고 가르칠 정도였다.


 


 



 


그가 총장직에 재임한 7년 동안,


그는 예수회를 가톨릭 개혁 운동의 기수로 만들었으며, 외국 선교 사업에 예수회의 참가를 독려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 설립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됨은 물론,


폴란드 관구 설정, 프랑스의 대학 설립, 아메리카 선교 개시 등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7년, 그는 예수회의 회칙을 개정했고,


1572년에 비오 5세 교황은 스페인에 보넬리 추기경을 특사로 파견하게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를 그의 수행원으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스페인 전역을 선교 여행하다가,


도중에 병을 얻어 로마로 돌아온 이틀만에 곧 중태에 빠져 영원한 행복을 받기 위해 세상을 떠났다.


때는 1572년 10월 1일,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의 축일은 교회의 결정대로 10월 10일에 지내게 된다.


 


예수회를 그토록 왕성하고 생기있는 수도회로 만든 이유들 때문에 그는 흔히 제2의 창설자로 불린다.


그의 유해는 처음 로마에 안장되었으나,


1617년 이래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있는 예수회원들의 서원소에 옮겨져 안치되었다. 그는 1670년에 시성되었다.


 



 


 


♬시편 8편


 


 


 


 


 


 


 


 


 


 


 


 


 


 


 


 


 


 


FRANCIS BORGIA


Also known as


Francisco de Borja; Francisco de Borja y Aragon


Memorial


10 October


Profile


Nobleman, raised in the court of King Charles V. Great-grandson of Pope Alexander VI. Married, and the father of eight children. Widower. Friend and advisor of Saint Ignatius of Loyola. Given charge of the Jesuit missions in the East and West Indies. Jesuit Superior General in 1560. Concerned that Jesuits were in danger of getting too involved in their work, he introduced their daily hour-long meditation. Under his generalship the Society established its missions in Florida, New Spain and Peru, and greatly developed its internal structures; for this Francis is sometimes called the "Second Founder of the Society of Jesus". Great mover in the counter-reformation.


Born


28 October 1510 at Gandia, Valencia, Spain


Died


30 September 1572 at Ferrara; relics translated to the Jesuit church in Madrid, Spain in 1901


Canonized


20 June 1670 by Pope Clement X


Patronage


against earthquakes, Portugal, Rota, Marianas


 


 


 


 



 


San Francesco Borgia Sacerdote


10 ottobre
 
Gandia, Spagna, 28 ottobre 1510 - Roma, 30 settembre 1572


Lontano parente di Alessandro VI e Ferdinando II d' Aragona, fu paggio presso la Corte di Carlo V. Si sposò con Eleonora de Castro da cui ebbe otto figli. Nonostante gli impegni che la carica di Viceré della Catalogna comportava, non tralasciò di condurre una vita spirituale intensa. Morta la moglie, entrò nella Compagnia di Gesù e, divenuto sacerdote, alternò la predicazione alla scrittura di trattati spirituali. Rinunciò alla carica di cardinale ma accettò gli incarichi importanti per la Compagnia, come quello di Commissario Generale. Sue caratteristiche furono l'umiltà, la mortificazione e una grande devozione all'Eucarestia e alla Vergine. Fondatore delle prime missioni dell'America Latina spagnola, vigilò sullo spirito originale dei gesuiti e impose a tutti l'ora di meditazione quotidiana.



Etimologia: Francesco = libero, dall'antico tedesco


 
Francesco Borgia, nato in Spagna nel 1510, smentì la mala fama che la propria potente famiglia si era acquistata in epoche precedenti. Infatti, pur avendo posizione mondana elevata e vita pubblica movimentata, egli riuscì a raggiungere, attraverso disparate vicende, la pienezza di una santità priva di ogni sospetto.
Il padre volle fare di lui un perfetto uomo di mondo, schernendo le sue inclinazioni religiose. E il ragazzo imparò le norme cavalleresche, ma studiò anche la filosofia; maneggiò le armi, ma non trascurò i libri; fu paggio presso la Corte imperiale, ma si fece terziario francescano.
La sua carriera fu brillante e movimentata. Era benvoluto da Isabella di Portogallo e dal marito Carlo V, il potentissimo Imperatore sui cui Regni " non tramontava mai il sole ". Egli lo nominò marchese di Lombai; ella gli dette in sposa Leonora di Castro, dalla quale ebbe otto figli. Fu eletto Gran Cavallerizzo dell'Imperatore e Grande Scudiero dell'Imperatrice. L'erede, Filippo 11, lo ebbe come amico e confidente. Viaggiava in portantina, leggendo però San Paolo e Giovanni Crisostomo. Impartiva lezioni di cosmografia all'Imperatore, che poi accompagnò in una guerra contro i Francesi. Ammalatosi e creduto in punto di morte, quando guarì prese l'abitudine alla Confessione e alla Comunione frequenti. Fu spinto verso una maggiore chiarezza spirituale dalla perdita della protettrice, l'Imperatrice Isabella, e dalla vista del suo volto decomposto dalla morte. Trovò allora una saggia e sicura guida spirituale nel Beato Giovanni d'Avila.
Proprio in quel tempo giungeva al culmine della sua carriera, con la nomina a Viceré di Catalogna. Per quattro anni si adoperò faticosamente per mutar volto a quella provincia, inquieta e ribelle, perché povera e mal governata. E quando, nominato Gran Maggiordomo e Consigliere di Stato, avrebbe potuto godere tranquillamente l'alta posizione, ritirandosi nel suo Ducato di Gandia, Ia morte dell'ancor giovane moglie lo spinse a quel passo che pose fine in modo imprevisto alla sua fortunata vicenda mondana.
Entrò nella Compagnia fondata da pochi anni dal conterraneo Ignazio di Loyola, e nel 1548 pronunziò i voti solenni. Considerando la sua eccezionale personalità, il Papa gli permise di restare nel mondo, per occuparsi dei figli del suo Ducato. Ma due anni dopo, Francesco Borgia rinunciò solennemente ai beni e alle cariche.
Avrebbe aspirato ad una vita ritirata e contemplativa, ma era una carta troppo importante per il giovane Ordine. Per obbedienza,- accettò perciò gli incarichi più laboriosi e impegnativi, e non deluse le speranze che la Compagnia riponeva in lui.
Con la sua saggezza, l'ammirazione di cui godeva, e l'aiuto di doni soprannaturali, Francesco Borgia con-tribuì all'espansione europea, anzi mondiale, della Compagnia di Gesù, preparando il rinnovamento cattolico della seconda metà del secolo.
Fu terzo Generale della Compagnia dopo Sant'Ignazio. Ne rinnovò le Costituzioni e ne fissò le pratiche spirituali. A Roma, fondò i principali Istituti dell'Ordine in rapido accrescimento. E viaggiò infaticabilmente fino alla vigilia della morte, venerato ambasciatore di carità e di concordia, autorevole consigliere di Imperatori, Re e Principi, per tornare finalmente a morire nella sua cella romana, nel 1572, riscattando il nome della famiglia dei Borgia con una gloria senza confini.


Fonte:  
 Archivio Parrocc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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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1-Feb-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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