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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10월2일
복자 앙트완느 슈브리에 사제
Beato Antonio Chevrier Sacerdote
Lione, 16 aprile 1826 - 2 ottobre 1879
E’ stato beatificato a Lione da papa Giovanni Paolo II, il 4 ottobre 1986.


 




 


프라도사제회 창설자


복자 슈브리에 신부의 생애


 


1. 어떤 시대에 살았나?        
복자 슈브리에 신부는 1826년 4월 16일에 프랑스 리용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결과로 공업화가 한창이었고 그 중심은 리용이었다. 농촌을 떠난 많은 농민들이 리용의 변두리에 와서 공장에서 비참한 조건으로 일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2. 새로운 회심의 때, 1856년 성탄 밤        
1846년 10월에 대신학교에 입학한 슈브리에는 교회가 가난한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음에 대해서 마음 아프게 생각하였다. 1850년 5월 25일에 리용교구 사제가 된 슈브리에는 열심한 보좌신부로서 살아가고 있던 중에, 1856년 여름에 리용을 뒤덮은 대홍수 때 헌신적으로 동네 사람들을 도와주던 중에 그들이 매우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856년 성탄 밤에 구유 앞에서 묵상하면서 자신의 회개를 위한 큰 빛을 받았다. ‘나를 회개시킨 것은 강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또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땅 위에 내려오셨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세상에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계속 버려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 주님을 더 가까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3. 프라도 카바레에서 시작  
그는 평신도 랑보를 만나서 가난한 사람들처럼 가난하게 생활하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직접 전하는 사명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된다. 사제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다. 1860년 12월 10일에 그는 리용 변두리에 있는 프라도 카바레를 인수하여서 성당에서 제대로 교리를 배우지 못한 동네의 비참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6개월 동안 기숙사 생활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면서 글을 가르치고 첫영성체 준비를 시켰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일치하게 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4.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사제 양성
그는 점차로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화를 위한 가난한 사제들을 양성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리용 교구장의 허락을 얻어서 댄스홀이던 그 프라도의 집에서 소신학생들을 받아들여서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활동하던 라기요띠에르 동네의 가난한 집안 젊은이들의 부모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사제’의 성소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그 젊은이들을 소신학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프라도 사제들을 양성하는데 그는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신학생들이 복음연구에 충실하여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 익히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양성을 위해서 ‘참다운 제자’를 저술하였다. 교구 사제들이 형제적 공동체를 이루기를 염원한 그는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 새롭게 일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교회는 많은 결실을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5. 생퐁의 영성
프라도의 집에서 아이들의 첫영성체를 준비하고, 필요로 하는 재원을 마련하고, 신학생들을 양성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슈브리에 신부는 리용의 남쪽 변두리에 있는 생퐁이라는 동네의 밭 한가운데 있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피정을 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분의 영을 따라서 가야할 길을 잘 정리해서 헛간의 벽에 기록해놓았다. 지금도 전 세계의 프라도 회원들이 그곳을 찾아가서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되새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내가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으니 내가 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요한 13,15)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예수님의 구유의 가난과 십자가의 봉헌과 성체성사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제는 헐벗은 사람이고,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며 먹히는 사람이어야 한다.


 


6. 하늘나라로
슈브리에 신부는 1879년 10월 2일에 27살의 젊은 후계자를 남겨두고 하느님 나라에 갔다. 가난하게 살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을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어준 그는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86년 10월 4일에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리용에서 그를 시복했다.


(프라도사제회홈에서)


 



 


복자 앙트완느 슈브리에 사제(1826-1879)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세가지 사건


산업화가 진행되던 프랑스 공업도시 리용에서 태어나 1850년 사제로 서품된 후 리용의 변두리 ‘라 기요띠에르’라는 서민동네의 성 안드레아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한다.


1856년 5월  론강이 홍수로 범람하게 되어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 주민들의 생활상을 목격
1856년 6월  철저한 가난의 삶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평신도 카미유 랑보와의 만남   
1856년 12월  성탄밤 구유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묵상하며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특별한 은총을 받으셨다.


 


슈브리에 신부님은 ‘프라도는 이순간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성탄절 밤, 우리 주님의 가난과 인간들 가운데서 그분의 낮추심을 묵상하면서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될 수 있는대로 가장 가난하게 살고자 결심했습니다. 나를 회심시킨 것은 강생의 신비입니다.”


 


 


본당을 떠나 가난한 이들에게로(아기예수 마을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할 동료 사제를 찾았으나 당시 부르주와적 생활에 익숙한 사제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어 자신이 스스로 가난의 삶과 사도적 삶을 살게 된다.
평신도 카미유 랑보가 운영하는 아기 예수 마을(이재민과 빈민들을 위한 주택촌) 지도신부로 들어간다.


 


“불쌍한 꼬마들, 이 아이들은 정말 가련합니다. 벽돌이나 집은 제자리에 놓여 있지만 이 아이들은 다시 오지 않고 다른 데로 가버립니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못 가게 말리면서도 오히려 다른 곳으로 가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있을 곳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봉사하는데 건축이 중요하다는 랑보에 반해 슈브리에 신부님은 무엇보다도 앞세워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들, 특히 마을에서 문제아들에게 복음을 전한는데 헌신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영혼과 교리교육이 우선이었던 슈브리에 신부는 랑보와의 이러한 의견차이로 마을을 떠나게 된다.


 


 


섭리의 집 '프라도'(Prado)
"하느님, 저에게 이집을 주시면 더 많은 영혼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영혼들을 위해 영적계획을 내놓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적 인 것을 주신다는 신뢰심 밖에 없었지만 그 장소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1860년 12월 10일, 슈브리에 신부는 ‘라기요띠에르’의 평판 나쁜 캬바레 ‘프라도’를 얻게된다.


그는 이곳에서 초기부터 가졌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사제단’ 이란 이상을 간직한 채 우선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 즉 산업화에 종교교육의 기회를 빼앗긴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첫영성체 사업’을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항상 안배가 따랐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 사업은 우선 가난한 사람들의 손으로 유지되고 그 다음에 부자들이 왔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적합한 순서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선 구유에서, 아주 보잘것없는 예물을 드린 목동들 틈에서 얼마를 보내셨고, 그 다음에야 지상에서 지체 높은 분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무료로 운영되던 프라도집에 보이신 하느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가난한 사제
슈브리에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하는 매우 독특한 사제양성 방법을 고안했다. 
프라도에 소신학교를 설립하면서부터 프라도사제회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것이 전부이다.
슈브리에 신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연구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을 배우는 데서 참다운 빛을 발견한다. 그 가운데 이미 완성되고 준비된 삶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음서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사로잡혀 프라도사업과 사제양성에 전념했던 슈브리에 신부는 그토록 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생애의 많은 시간을 복음공부에 할애한다.  



 
1879년 10월 2일 53세로 선종. 
1986년 10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프라도수녀회홈에서)


 



 


프라도 사제회<역사적 기원>


프라도 사제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리옹 교구의 사제 ‘앙트완느 슈브리에’를 통하여 교회에 내려 주신 은총의 결실이다. 1850년 주교로부터 리옹의 변두리 동네 ‘라기요티에르’로 파견된 슈브리에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그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슈브리에 신부는 당시의 교회와 도시 변두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무지한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 사이에 있는 괴리를 보고 큰 고통을 느꼈다. 1856년에 일어난 홍수 때 다시 한 번 확인된 민중의 참상은 급기야 성 안드레아 본당 보좌 신부인 슈브리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1856년 성탄절 밤에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던 앙트완느 슈브리에는 자신의 생애와 사제 활동의 방향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데로 고정시켜 주는 빛을 받게 되었다. 슈브리에는 이렇게 말했다. “프라도는 성 안드레아 본당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바라고 가능한 한 가장 가난하게 살기로 결심한 것은, 성탄절 밤에 우리 주님의 가난과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을 낮추신 그분에 관하여 묵상하던 중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또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땅 위에 내려오셨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세상에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계속 버려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 주님을 더 가까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프라도사제회홈에서)


 



 


한국 프라도사제회
[프] l'association des pretres du Prado
[영] Prado Priest Association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화에 투신하는 교구 신부들의 공동체.
“프라도 사제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지닌 사도적 소명과 사명 안에서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재속회에 관한 교회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성좌 설립의 재속 사제회다. 본회는 사제들과 봉헌된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제들은 재속 사제로서 그 사도적 사명을 수행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 안에 있는 사제들로서, 주교들의 협력자들로서, 사제의 직분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교구의 주교로부터 직접 교회법적인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본회에 속한 봉헌된 평신도도 복음의 길에 자신의 전생애를 바치고 또 복음화 임무 참여함으로써, 세상 안에서 이와 똑같은 소명을 수행한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과의 만남으로써 자극을 받고 재촉을 받게 된 프라도회 회원들은 앙트완느 슈브리에 신부를 영신적 지도자로 삼고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며, 성령에 의해 인도를 받고 성령에 의해 우리 자신의 모습이 형성되도록 하는 데 투신하고자 한다.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며, 그분과 함께 그분처럼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그리고 죄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삶에 동참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증거한다. 


 


각 교구에서 서품을 받고 성사적 직분과 형제애를 함께 나누는 교구 사제단의 구성원들로서 프라도회의 사제들은 물질적, 영신적, 사목적인 면에서 교구 성직자 생활에 해당하는 모든 것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주교의 사목적 직무에 협력한다. 프라도 사제회는 특수한 사도적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를 특징지어야 할 사도적 방향을 가지고 있다. 그 방향이란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애쓰고 또 ‘가난한 사람들과 같게 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프라도사제회홈에서)


 




 


프라도의 표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표현하는
'구유- 십자가-감실' 을 형상화 한 것인데,
사제직에 관한 슈브리에 신부님의 영성이 요약되어 있는
'생퐁의 도표(Le tableau de St. Fons)'에서 유래합니다.


 


슈브리에 신부의 기도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선하시고도 위대하시나이다.
누가 주님을 속속들이 알고 깨달을 수 있으리이까!
그리스도님, 주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서는 빛이시니,
이 가난한 영혼에 한 가닥 빛살을 보내주시어,
주님을 뵙고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무한히 선하신 주님,
단 한 번이라도 주님을 우러러 뵙게 하소서.
주님의 그 찬란한 광휘를 조금 낮추시어,
저의 눈이 주님을 우러러 뵙고
주님의 완전하심을 바라보게 하소서.
저의 귀를 열어 주시어,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가르치심을 묵상하게 하소서.
저의 정신과 지력을 열어 주시어,
저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주님의 말씀을
맛들이고 올바로 알아듣게 하소서.
주님께 크나큰 믿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하면 주님의 모든 말씀이 빛이 되어 저를 비추어 주고
주님께 나아가게 하며,
오로지 정의와 진리의 길을 거닐며 주님을 따르게 하리이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저의 주님, 저의 유일한 스승이시나이다.
주님, 말씀하소서.
말씀께서 하늘로부터 내리심을 아오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리이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묵상하고 실행하리니
주님의 말씀에 생명과 기쁨, 평화와 행복이 있기 때문이나이다.

주님, 말씀하소서.
저의 주님, 저의 스승이시여,
오로지 주님의 말씀 듣기가 소원이나이다.


 



 


 

♬6.Agnus Dei-빈소년합창단

 


 


 


 


 


 


 


 


 


Beato Antonio Chevrier Sacerdote
2 ottobre 
Lione, 16 aprile 1826 - 2 ottobre 1879


E' un precursore dell’impegno sociale del clero nei tempi moderni. Nato a Lione nel 1826 e ordinato nel 1850, iniziò come vicario parrocchiale in una zona operaia. Su invito del santo Curato d’Ars divenne direttore spirituale della "Città di Gesù Bambino", opera nata per diffondere la Prima Comunione tra i ragazzi degli strati sociali più deboli e dare alloggio ai poveri. Nel 1860 fondò una casa per i giovani, rilevando il "Prado", malfamata sala da ballo caduta in disuso. Nacquero così l’Istituto della Provvidenza del Prado e, poi, la Società dei preti del Prado. Morì nel 1879, riposa nella cappella dell’ex balera. Il Papa lo ha beatificato a Lione nel 1986. (Avvenire)



 
Nacque il 16 aprile 1826 a Lione, da una modesta famiglia, a 17 anni entrò in Seminario e fu ordinato sacerdote a 24 anni nel 1850. Iniziò la sua missione pastorale in una parrocchia operaia della periferia come vicario. Nel 1856, mentre era in intensa preghiera, davanti al presepe, ebbe l’intuizione della divina povertà.
Sotto la giuda del santo Curato d’Ars, Giovanni Maria Vianney, accettò di diventare il direttore spirituale della “Città di Gesù Bambino”, che si proponeva di incentivare la Prima Comunione nei bambini poveri e procurare l’alloggio ai miserabili.
Conscio dell’immenso campo di lavoro, pensò di fondare una propria opera e nel 1860 acquistò il ‘Prado’ che era un’antica sala da ballo, ormai in rovina, chiamando l’istituzione “ La Provvidenza del Prado”.
Andò avanti per una ventina d’anni con il solo aiuto di qualche sacerdote, affiancò all’opera una scuola di chierici, i quali diventati preti formarono la “Società dei Preti del Prado”, con lo scopo di gestire l’opera iniziale e le sue attività caritatevoli.
Morì il 2 ottobre 1879, dopo una lunga e sofferta malattia, il suo corpo riposa nella cappella del Prado, fu un precursore dell’impegno sociale del sacerdozio.
E’ stato beatificato a Lione da papa Giovanni Paolo II, il 4 ottobre 1986.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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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7-Feb-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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