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8월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ST.POPE PIUS X
St.Pius the Tenth
San Pio X (Giuseppe Sarto) Papa
(Riese, Treviso, 2 giugno 1835 - Roma, 20 agosto 1914 )
Born :1835 as Giuseppe Sarto at Riese, Treviso, Venice, Austria (now Italy)
Papal Ascension :1903 (Papa dal 09/08/1903 al 20/08/1914)
Died :20 August 1914; natural causes aggravated by worries over the beginning of World War I
Canonized :1954 by Pope Pius XII
Pio = devoto, religioso, pietoso (signif. Intuitivo)
한 가난한 이탈리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가 되신 요셉 사르토는
신학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베네치아와 만투아의 주교로서 그 명성을 널리 떨치셨습니다.
그리고 후일 비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피선되셨습니다.
그의 좌우명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십시오."는
교회 갱신과 변혁의 이정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교황선출시 모든 정치적 개입을 배제한 그는 교회 행정과 주교 지명 방법을 개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롭고 보편적인 교회 법전을 편찬하였습니다.
특히 성가와 성무 일과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어린이들의 첫 영성체,
매일 영성체와 끊임없는 성서 공부를 권고하였고
사제들의 목자적 임무 수행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그들의 학문 수준을 향상 시켰습니다.
인간적 재능과 조직 능력이 풍부하게 첨부된 그의 깊은 종교적 정신은
교회의 전반적 삶의 양상과 선교사업에 집중되었습니다.
모든 타협을 거부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정부들과 약간의 충돌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14년 8월21일 그의 정신과 신앙을 흠모하던 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슬퍼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His will read: "I was born poor; I lived poor; I wish to die poor."
그는 자신이 소박한 신분의 출신임을 잊지 않고 항상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으며 가난하게 살았고 가난하게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Pio(pius)는 경건한 사람이란 뜻이다.
성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트레비스 교외 리에제에서 태어났다.
구두 수선 및 우체부의 10남매 중 하나로 이름은 쥬세뻬 멜치오르 사르또였다.
1850년에 파두아 신학교에 들어갔다.
1858년에 사제가 된 그는 향후 17년 동안의 본당 사목자 생활은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 수행에서 탁월했다.
1884년에 만투아의 주교가 되었으며, 베니스의 추기경과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레오 13세를 계승하여 1903년 교황이 되었다.
특히 그는 성체를 자주 영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는 교회법 개정을 착수했고, 불가타 성서 개역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일도서 개정을 명하였다.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어지러운 세상에 많은 회칙을 반포하면서 진리를 선포하는데 힘썼다.
1910년에는 프랑스 사회 운동인 "실롱"을 단죄했다.
만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정립하는 것을 자신의 교황직의 목표로 삼아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단순성과 가난과 강인함으로 신자들 가운데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발전시키고
그 당시 교회를 휩쓸던 오류들에 대항하여 굳건히 싸우며 교회를 보호하고 지키는 데 뛰어났다.
1914년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54년에 비오 1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는데,
이는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역대 교황들 중에 두번째로 시성된 교황이다.
성 비오 10세는 영성체를 자주 하도록 권장하고 첫 영성체 시기를 낮추었으며
날마다 규칙적으로 성서를 읽도록 권장한 성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라는 그의 모토가 말해 주듯이
그는 말씀으로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성서를 읽게 하기 위해서 위원회를 조직하여
성서 개정 작업을 했으며,나아가 성서 공부를 위한 교육 기관을 세우기도 했다.
성서를 비롯하여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준비’와 ’훈련’과 ’규칙’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우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준비해야 하고 두 번째는 그것을 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규칙적으로 실행해서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지겹도록’ 반복하여 ’습관’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www.ofmconv.or.kr)
성 비오 10세 교황의 [성무일도에 관한 교황령]에서
(AAS 3[1911], 633-635)
주님께 찬미 노래를 바치는 교회
성서에 수집되어 있는 시편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이다.
교회는초기부터 신자들의 신심을 기르는 데 시편을 사용하여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이 시편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자기 입으로 찬양했다."
더욱이 시편은 옛 법의 관습을 따라 거룩한 전례와 성무일도에서 주요한 부분을 담당해 왔다.
성 바실리오는 시편을 "교회의 소리"라 하고
우리 선대 교황 우르바노 8세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옥좌 앞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거룩한 찬미가의 메아리"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성 아타나시오의 말에 의하면,
시편은 특히 자신의 주요 직분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데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무슨 말로 합당하게 찬미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따라서 성아우구스띠노는 아름다운 말로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이 당신을 합당하게 찬양할 수 있는지 보여 주시고자
먼저 당신 스스로를 찬양하셨고,
이렇게 하심으로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시편은 또 우리 영혼 안에 모든 덕행을 얻고자 하는 열의를 불붙일 힘을 지니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하듯
’성경은 신구약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는 데 유익한 책’이지만
시편집은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의 열매를 담고 있는 정원처럼 찬미가를 부르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열매와 다른 책들의 열매를 모두 보여준다."고 아타나시오는 말한다.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시편은 그것을 부르는 사람에게 거울과도 같아
그안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감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정감의 생생한 표현이 된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여, 나는 당신 교회가 부르는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가슴 뭉클하여
당신을 노래하는 찬미가와 찬가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나이다.
이 노랫소리는 내 귀에 흘러 들어가 진리가 내 마음을 축축히 적셔 주게 하고
내 신심의 정이 불타오르게 하여 눈물이 쏟아지게 했나이다.
이때 내 마음은 그 찬미 노래로 얼마나 행복에 넘쳤는지 모르나이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엄위와 그분의 전능하심과 표현할 수 없는 정의,
그분의 선과 자비 그리고 그분의 다른 무한한 속성을
그렇게도 숭고하게 전하는 시편의 많은 부분들을 들을 때 감동받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이와 마찬기지로 시편에 나오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한 감사의 노래,
소망하는 은총에 대한 겸손하고 신뢰에 찬 기도,
그리고 죄를 뉘우치는 영혼의 외침에 감동받지 않을 이 어디 있겠는가?
성 아우구스띠노
"모든 시편 속에서 노래하시고 애통하시며 희망에 부풀어 즐거워 하시고 고뇌에 차 탄식하시는"
구속주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불타오르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가문이나 재산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신학적 학식이 충문하며 경험과 덕행이 겸비한 이라면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뜻이 그렇고, 교황 비오 10세는 그 좋은 한 예이다.
비오 10세는 북 이탈리아의 트레비스 교외 리에세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 및 우편 배달부로 후에 우체국 국장이 된 사르토였다.
비오 10세는 10남매 중 장남으로 그의 이름은 조세페(요셉) 멜키오레 사르토였다.
어려서부터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고자 카스테르프란코에 있는 어떤 중학교에 다녔으나,
이것도 가정 형편으로 인해 어떤 때는 맨발로써 통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부모에세는 아직 교육시켜야 할 자녀가 수명이나 있었으므로,
요셉이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서의 장학생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
마침 그의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는 1850년 파두아 신학교에 들어가 학업을 마틸 수가 있었다.
그의 본당 신부는 이미 연로하고 병약한 분이었으나,
그는 9년간 그의 밑에서 보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리하여 자연히 그의 위대한 능력은 인정되어 살차노 본당의 주임 사제가 되었다.
살차노 본당 교우들은 그가 별로 이렇다 할 가문의 출신이 아니라 하여 신통히 대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재능 및 그가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사랑과 희생과 협조는 곧 지방민의 인심을 사게 되어,
9년 후 그가 트레비소 대신학교에 고문 겸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는
애석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1875년 11월에 트레비소 대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와 교구의 성서국장을 지냈다.
그가 대신학교에서 교수로 9년간을 지내고 레오 13세는 그를 1884년에 만토바의 주교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교구를 활성화시켰고,
그로부터 9년 후인 1893년에는 베네치아의 총주교 겸 추기경이 되었다.
그때 그는 이러한 직을 사양하려 했으나, 란포라의 추기경에게
“이미 그러한 직을 사양한 사람이 한 분 있으므로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교황께서는 크게 마음 상할 것” 이라는 주의를 받고 온순히 교황의 뜻을 따랐다.
그는 그때부터 대교구중의 하나인 자기 교구의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으며,
인심 수습을 위해 노력했고,과거에 반목되어 있던 정부와도 타협을 하게되었다.
그가 가장 중요시 한 것은 빈민들이었다.
그는 자기 필수품까지 전부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어떤 때는 생활에 곤란을 느낄 때가 많았다.
1903년 레오 13세의 서거로 사르토 추기경도 교황 선거를 하기 위해 로마로 상경하게 되었다.
그는 선거 후 곧 돌아갈 줄 알고 왕복차표를 마련했다.
그러나 돌아갈 차표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압도적 다수표로 새로운 교황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으로서의 이름은 그 전대의 교황 비오의 이름을 따서 그는 비오 10세가 되었다.
4억 인의 세계 신자들을 인솔하여 과학의 진보와 더불어
유물론이며 기타 불신, 부도덕적인 세상에 대처해 나아감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비오 10세의 특기할 만한 사적 중에는 신앙을 견고히 하기 위한 운동과
신자의 영신적 양식이 되는 성체를 자주 또한 정당히 영하기 위한 회칙을 반포한 것이다.
이러한 법칙 변경으로 인해 수백 만 명의 신자들이
세상에서 혹은 천국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비오 10세는 전임 교황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교황좌에 오른 후 발표한 첫 번째 칙서 “E Supremi Apostolatus"(10월 4일)는
추기경단에 한 훈시와 더불어 비오 10세의 사목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과 배교가 어느 시대보다도 심하게 일어나는 시대임을 강조한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회복시켜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하자고 호소했다.
그는 교회법 개정을 착수했고, 불가타 성서 개역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 일도서 개정을 명했다.
특히 그는 성체를 자주 영하도록 권장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모던니즘”과의 투쟁이 많았고, 1910년에는 프랑스사회 운동인 “실롱”을 단죄했다.
그의 만년인 1914년 8월 2일에 돌연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평화의 회복을 위해 전력했으나 결국 허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난 1924년 8월 20일을 일기로 그는 영원히 세상을 하직했다.
교황이 서거하자 전세계는 겸손하고 열심한 교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추기경단의 요청으로 엄격한 시복 시성 조사를 한 후
그분으로부터 3대의 후계자인 비오 12세에 의해 1951년 6월 3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고,
1954년 5월 29일에는 역시 같은 장소에서 시성되었는데,
이는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처음으로 시성된 교황이다.
♬시편136(137)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San Pio X (Giuseppe Sarto) Papa
21 agosto - Memoria
Riese, Treviso, 2 giugno 1835 - Roma, 21 agosto 1914
(Papa dal 09/08/1903 al 20/08/1914)
Giuseppe Sarto, vescovo di Mantova (1884) e patriarca di Venezia (1893), sale alla cattedra di Pietro con il nome di Pio X. È il primo Papa dell’età contemporanea a provenire dal ceto contadino e popolare, seguito 65 anni dopo da Papa Giovanni XXIII. È uno dei primi pontefici ad aver percorso tutte le tappe del ministero pastorale, da cappellano a Papa. È il pontefice che nel Motu proprio «tra le sollecitudini» (1903) afferma che la partecipazione ai santi misteri è la fonte prima e indispensabile alla vita cristiana. Difende l’integrità della dottrina della fede, promuove la comunione eucaristica anche dei fanciulli, avvia la riforma della legislazione ecclesiastica, si occupa della Questione romana e dell’Azione Cattolica, cura la formazione dei sacerdoti, fa elaborare un nuovo catechismo, favorisce il movimento biblico, promuove la riforma liturgica e il canto sacro. (Avvenire)
Etimologia: Pio = devoto, religioso, pietoso (signif. Intuitivo)
Fu il primo papa dell’età contemporanea a provenire dal ceto contadino e popolare, seguito 65 anni dopo da papa Giovanni XXIII anch’egli di origini contadine, ma fu senz’altro uno dei primi pontefici ad aver percorso tutte le tappe del ministero pastorale, da cappellano a papa.
Giuseppe Melchiorre Sarto nacque a Riese (Treviso), oggi Riese Pio X, il 2 giugno 1835, secondo dei 10 figli di Giovanni Battista Sarto e Margherita Sanson; il padre era messo comunale e nel tempo libero coltivava un piccolo appezzamento di terreno.
Sin da ragazzo dimostrò forza di carattere e tenace volontà; serenamente sopportava i sacrifici imposti dalla condizione povera della famiglia, percorse per anni ogni giorno a piedi, spesso scalzo, la strada che conduce da Riese a Castelfranco per poter frequentare la scuola.
Dotato di predisposizione allo studio, fu aiutato da alcuni sacerdoti e poi dal patriarca di Venezia, anch’egli originario di Riese, che gli offrì un posto gratuito nel Seminario di Padova, a quell’epoca uno dei migliori d’Italia e anche qui ben presto si notò la ricchezza della sua indole, dotata di notevole equilibrio.
Quando aveva 17 anni, nel 1852, morì il padre e gli amministratori del piccolo Municipio di Riese, per aiutare la numerosa famiglia, offrirono al giovane Giuseppe l’impiego occupato dal padre.
Ma l’eroica madre Margherita, rifiutò l’offerta, perché il ‘Bepi’ doveva seguire la sua vocazione sacerdotale; avrebbe pensato lei con il suo lavoro di sarta, a portare avanti la famiglia, lavorando notte e giorno.
Fu ordinato sacerdote a 23 anni (settembre 1858) e subito nominato cappellano a Tombolo (Padova) piccola parrocchia di montagna, dove giunse il 29/11/1858, qui profuse le giovani forze nell’apostolato e nel ministero sacerdotale per ben nove anni.
Essendo risultato primo al concorso, fu nominato nel 1867 parroco a Salzano, grosso borgo della provincia veneziana, dove rimase per circa nove anni.
Dotato di una salute di ferro, di un’energia che non conosceva debolezza e di una sorprendente capacità di rapportarsi con gli altri, egli si diede anima e corpo all’attività parrocchiale, suscitando l’ammirazione dei parrocchiani e dei confratelli sacerdoti.
Nel novembre 1875 il vescovo di Treviso lo chiamò presso di sé nominandolo Canonico della Cattedrale, Cancelliere della Curia Vescovile, Direttore spirituale del Seminario; incarichi di prestigio per il giovane sacerdote Giuseppe Sarto (aveva 40 anni), il quale trascorreva la mattina al vescovado e il pomeriggio in Seminario.
Adempiva ai suoi compiti con dedizione e competenza, la sua sollecitudine gli faceva portare a casa le pratiche non ancora evase che sbrigava anche nelle ore notturne, la sua buona salute gli consentiva di recuperare le forze con appena 4-5 ore di sonno.
Il suo modo di agire, pieno di comprensione verso gli altri e il suo amore particolare per i poveri, gli guadagnarono l’affetto e la stima di tutti, cosicché nessuno si meravigliò quando nel settembre 1884, papa Leone XIII lo nominò vescovo di Mantova.
La diocesi mantovana attraversava un periodo particolarmente difficile, sia al suo interno, sia con il potere civile, ma il modesto prete Giuseppe Sarto, conosciuto per la fama di oratore brillante e per la sua grande carità, si rivelò un capo, con uno spirito realistico, pronto a cogliere il nodo dei problemi e a trovarne le soluzioni pratiche, con una bonarietà sorridente ma che all’occorrenza sapeva accompagnarla con una fermezza innata.
Seppe pacificare gli animi e avviò un profondo rinnovamento della vita cristiana in tutta la diocesi; incoraggiò l’affermarsi delle cooperative operaie; formatosi sotto papa Pio IX e nel clima reazionario della monarchia asburgica, alla quale il Veneto fino al 1866 era soggetto, mons. Sarto era considerato un “intransigente”, che condannava il liberalismo e lo spirito di apertura alla mentalità moderna.
Erano problemi che agitavano la Chiesa del post Stato Pontificio e la ventata di modernismo proveniente da tanti settori della società, vedeva nelle diocesi italiane il contrapporsi di ideologie, con vescovi permissivi e altri intransigenti alle aperture.
Papa Leone XIII apprezzando il suo operato, lo elevò alla dignità cardinalizia il 12 giugno 1893 con il titolo di San Bernardo alle Terme e il 15 giugno lo destinava alla sede patriarcale di Venezia, anch’essa in una situazione particolarmente difficile.
Ma il suo ingresso poté avvenire solo il 24 novembre 1894, perché mancava il beneplacito del Governo Italiano; il re d’Italia Umberto I°, sosteneva di avere il diritto di scelta del patriarca per un antico privilegio della Repubblica Veneta, ma alla fine dopo 17 mesi si addivenne ad un compromesso.
Pur avendo conservato un certo attaccamento sentimentale per Francesco Giuseppe, il sovrano austriaco dei suoi primi trent’anni, al contrario dell’ambiente di curia, il patriarca Sarto manifestò verso la Casa Savoia e il giovane Regno d’Italia un atteggiamento più conciliante, ormai convinto che indietro non si sarebbe più ritornati.
Riteneva necessario preparare un progressivo riavvicinamento tra la nuova Italia e la Santa Sede, risolvendo la ‘Questione Romana’ e salvaguardando tutto ciò che vi era di essenziale sotto l’aspetto spirituale, ma abbandonando ciò che era transitorio nelle posizioni prese da papa Pio IX, dopo l’occupazione dello Stato Pontificio e perseguite anche da papa Leone XIII.
Incurante delle critiche e dello stupore di alcuni, non esitò ad indurre i cattolici veneziani ad allearsi con i liberali moderati, per far cadere l’amministrazione comunale massonica, che aveva soppresso il catechismo nelle scuole e fatto togliere il crocifisso negli ospedali.
Mobilitò i parroci e i gruppi di Azione Cattolica, moltiplicò le riunioni dei comitati, governò la stampa cattolica; il suo avvicinamento all’Italia ufficiale, era dettato da un realismo pastorale e non per simpatia all’ideologia liberale e modernista che personalmente rifiutò sempre.
A Venezia ci fu una fioritura della vita religiosa, gli adulti venivano istruiti nella fede e organizzati in Associazioni religiose; i bambini venivano preparati alla Prima Comunione e Cresima con particolare impegno, le celebrazioni liturgiche presero nuovo decoro con la solennità dei canti sacri.
In questo periodo conobbe il giovane Lorenzo Perosi, ne ammirò il talento musicale, lo aiutò e incoraggiò a diventare sacerdote, gli affidò la riforma del canto liturgico prima a Venezia e poi a Roma.
Amò i poveri, ai quali donava tutto quello che possedeva, giunto a Venezia non volle una porpora cardinalizia nuova, ma fece riadattare dalle sue sorelle che l’avevano seguito, quella vecchia del suo predecessore, donando ai poveri la somma equivalente per una nuova.
Pur essendo ostile al socialismo e al liberalismo, non mancò, come a Mantova, di preoccuparsi di tutto quanto potesse migliorare le condizioni di vita degli operai, incoraggiò le Casse Operaie parrocchiali, le Società di Mutuo Soccorso, gli uffici di collocamento popolare e per indirizzare il clero in questa direzione, istituì nel 1895 una cattedra di scienze economiche e sociali nel Seminario.
A Venezia amò tutti ed era amato da tutti; il 15 ottobre 1893 il cardinale era al capezzale dell’anziana madre morente, la quale aveva espresso il desiderio prima di morire di vedere il figlio vestito dei suoi abiti cardinalizi e lui volle accontentarla, si presentò all’improvviso quel mattino e la madre vedendolo esclamò con stupore: “Ah Bepi, sè tutto rosso!…” e lui: “E vu mare, sè tutta bianca!”.
Il 20 luglio 1903 ad oltre 93 anni, morì papa Leone XIII, che aveva governato la Chiesa oltre 25 anni e il patriarca di Venezia card. Sarto partì alla volta di Roma, alla stazione ferroviaria una gran folla lo circondò per salutarlo ed egli commosso rassicurò loro “Vivo o morto ritornerò”, del resto il biglietto per il treno che gli era stato offerto, era di andata e ritorno.
Quelle parole furono profetiche, perché il patriarca Sarto non tornò più a Venezia perché eletto papa; ma un suo successore, papa Giovanni XXIII, anch’egli patriarca della città lagunare, autorizzò il ritorno dell’urna con il corpo dell’ormai santo Pio X, che avvenne trionfalmente il 12 aprile 1959; l’urna esposta nella Basilica di San Marco, rimase a Venezia per un mese fino al 10 maggio, a ricevere il saluto e la venerazione dei suoi veneziani.
Il Conclave che seguì fu uno dei più drammatici, perché fu l’ultimo in cui venne esercitata “l’esclusiva” di un governo cattolico nei confronti di un papabile sgradito.
Il candidato più autorevole a succedere a Leone XIII era il suo Segretario di Stato card. Mariano Rampolla del Tindaro, ritenuto dal governo asburgico un continuatore della politica di sostegno dei cristiano-sociali in Austria e Ungheria e favorevole alle aspirazioni indipendentiste degli Slavi nei Balcani; il cardinale di Cracovia si fece portatore del veto imperiale contro Rampolla, fra le proteste del Decano del Sacro Collegio Cardinalizio e di altri cardinali, per l’ingerenza del potere civile.
Ad ogni modo il conclave durato quattro giorni designò il 3 agosto 1903, il patriarca di Venezia nuovo pontefice, nonostante le sue implorazioni a non votarlo, il quale alla fine accettò prendendo il nome di Pio X.
Il suo pontificato durò 11 anni, rompendo la sua personale cadenza negli incarichi ricevuti che furono stranamente sempre di nove anni; 9 anni in Seminario, 9 come cappellano a Tombolo, 9 anni come parroco a Salzano, 9 come canonico e direttore del Seminario a Treviso, 9 come vescovo di Mantova e 9 come patriarca di Venezia.
Aveva 68 anni quando salì al Soglio Pontificio instaurando una linea di condotta per certi versi di continuità con i due lunghissimi pontificati di Pio IX e Leone XIII che l’avevano preceduto, specie in campo politico, ma anche di rottura con certi schemi ormai consolidati, ad esempio, sebbene di umili origini egli rifiutò sempre di elargire benefici alla famiglia, come critica verso certi nepotismi e favoritismi più o meno evidenti, fino allora praticati.
Suo Segretario di Stato fu il card. Merry del Val, con il quale si dedicò ad una riaffermazione ben chiara dei diritti della Chiesa e ad una strategia ad ampio raggio per ristabilire l’ordine sociale secondo il volere di Dio.
Davanti ai grandi progressi di un liberalismo prevalentemente antireligioso, di un socialismo prevalentemente materialista e di uno scientismo presuntuoso, Pio X avvertì la necessità di erigere il papato contro la modernità, spezzando ogni tentativo di avviare un compromesso efficace tra i cattolici e la nuova cultura.
Con l’enciclica “Pascendi” del 1907 condannò il ‘modernismo’; in campo politico riprese la linea intransigente di Pio IX, egli considerava la separazione della Chiesa dallo Stato come un sacrilegio, gravemente ingiuriosa nei confronti di Dio al quale bisogna rendere non solo un culto privato ma anche uno pubblico.
La riaffermazione del potere papale, dopo le vicissitudini della caduta dello Stato Pontificio, portarono con il pensiero di Pio X ad identificare l’istituzione papale con la Chiesa intera, la Santa Sede con il popolo di Dio.
Non si può qui fare una completa panoramica del suo pontificato, vissuto alla vigilia della Prima Guerra Mondiale e del sorgere della Rivoluzione Russa, e in pieno affermarsi dei nuovi movimenti di pensiero come il modernismo, il liberalismo, infiltrati di materialismo e spirito antireligioso, con una Massoneria dilagante.
Centinaia di libri sono stati scritti su quel vivace periodo, ne citiamo uno: “Crisi modernista e rinnovamento cattolico in Italia” di Pietro Scoppola, Bologna, 1961.
Il 20 gennaio 1904 papa Pio X reduce dal drammatico conclave che l’aveva eletto, stabilì che nessun potere laico esterno, potesse opporre un veto nell’elezione del pontefice e fulminò con scomunica quei cardinali che si prestassero a fare da portavoce, anche del semplice desiderio o indicazione di uno Stato.
Pio X che amava presentarsi come un “buon parroco di campagna” aveva in realtà notevoli doti e non era affatto sprovvisto di cultura, leggeva numerose opere, parlava e leggeva il francese, possedeva un gusto artistico e protesse i tesori d’arte della Chiesa; cultore della musica, amò il canto liturgico.
Uomo di grandezza morale, viveva in Dio e di Dio, esercitava le virtù cristiane fino all’eroismo, con una umiltà diventata la sua seconda natura senza la minima ostentazione; una effettiva povertà e un atteggiamento di distacco di fronte a se stesso che non abbandonava mai; una fede e una fiducia nella Provvidenza origine di quella serenità interiore che si poteva ammirare in lui; inoltre una carità che destava la meraviglia dei dignitari del Vaticano.
“Instaurare omnia in Cristo” era il motto di papa Pio X e con la forza e la costanza che gli erano proprie, cercò di attuare in tutti campi questa restaurazione della società cristiana a partire dalla Chiesa; riformò profondamente la Curia Romana e le varie Congregazioni, fece redigere un nuovo Codice di Diritto Canonico; applicò le norme per la Comunione frequente e per i bambini; riformò la Liturgia togliendo dal Messale molte cose inutili, riportò al ciclo delle domeniche, il posto che era stato usurpato dal ciclo dei Santi; sollecitò il canto e la musica nelle funzioni sacre; istituì l’obbligo del catechismo a piccoli e grandi e che da lui si chiamò “Catechismo di Pio X”.
Verso la fine del suo pontificato, sull’Europa si addensavano nubi minacciose di guerra, che coinvolgevano molti Stati cattolici in contrasto fra loro.
Dopo l’attentato di Serajevo all’arciduca ereditario Francesco Ferdinando, seguì il 28 luglio 1914 l’attacco dell’Austria alla Serbia e man mano il conflitto si estese a tutta l’Europa; per papa Pio X, già da tempo sofferente di gotta e quasi ottantenne, fu l’inizio della fine, il suo stato di salute e il deperimento fisico si accentuò e dopo una bronchite trasformatosi bruscamente in polmonite acuta, il pontefice morì nella notte tra il 20 e il 21 agosto 1914; fu sepolto nelle Grotte Vaticane.
In vita era indicato come un “Papa Santo”, perché correva voce di guarigioni avvenute toccando i suoi abiti, ma lui sorridendo correggeva: “Mi chiamo Sarto non Santo”. Fu beatificato il 3 giugno 1951 da papa Pio XII e proclamato santo dallo stesso pontefice il 29 maggio 1954; la sua urna si venera nella Basilica di S. Pietro.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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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3-Jun-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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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Pius X
Also known as
Giuseppe Melchior Sarto; Giuseppe Melchiorre Sarto; Giuseppe Sarto; Joseph Sarto; Pope of the Blessed Sacrament
Memorial
21 August
Profile
Son of Giambattista Sarto, a village cobbler, and Margherita Sanson. Lived an impoverished childhood as one of eight children. Baptized on 3 June 1835. Confirmed on 1 September 1848. Felt a calling to the priesthood from his youth. Studied at the seminary of Padua, and was known as an exceptional student. Ordained by Blessed Giovanni Antonio Farina on 18 September 1858. Chaplain at Tombolo from 1858 to 1867. Archpriest of Salzano from 1867 to 1875. Canon of the Treviso cathedral chapter in 1875. Rector of the Treviso seminary and its spiritual director for nine years. Primicerius of the cathedral in 1879. Chancellor of the diocese of Treviso. Vicar capitular from December 1879 to June 1880. Bishop of Mantua, Italy on 10 November 1884. Assistant at the Pontifical Throne on 19 June 1891. Created cardinal-priest of Saint Bernardo alle Terme on 12 June 1893. Patriarch of Venice on 15 June 1893. Chosen 257th pope, taking the name Pius X.
Issued decrees on early (age 7 instead of 12 or 14 as previously) and frequent Communion. Destroyed the last vestiges of Jansenism by advocating frequent and even daily Communion. Reformed the liturgy, promoted clear and simple homilies, and brought Gregorian chant back to services. Revised the Breviary, and teaching of the Catechism. Fought Modernism, which he denounced as "the summation of all heresies". Reorganized the Roman curia, the administrative elements of the Church. Worked against the modern antagonism of the state against the Church. Initiated the codification of canon law. Promoting Bible reading by all the faithful. Supported foreign missions. His will read: "I was born poor; I lived poor; I wish to die poor."
Born
2 June 1835 at Riese, diocese of Treviso, Venice, Austria (now Italy) as Giuseppe Melchiorre Sarto
Papal Ascension
elected 4 August 1903; installed 9 August 1903
Papal Beatifications
1906: Blessed Marie Genevieve Meunier 1906: Blessed Rose Chretien 1906: Saint Valentin Faustino Berri Ochoa
1907: Blessed Clarus
1907: Blessed Zedislava Berka
1907: Saint John Bosco
1908: Blessed John van Ruysbroeck
1909: Blessed Andrew Nam Thung
1909: Saint Agatha Lin
1909: Saint Agnes De
1909: Saint Joan of Arc
1909: Saint John Eudes
Papal Canonizations
1904: Saint Alexander Sauli
1904: Saint Gerard Majella
1909: Saint Clement Mary Hofbauer
1909: Saint Joseph Oriol
Died
20 August 1914 at Vatican City from natural causes aggravated by worries over the beginning of World War I; buried under the altar of the chapel of the Presentation, Saint Peter's basilica
Beatified
3 June 1951
Canonized
29 May 1954 by Pope Pius XII
Patronage
archdiocese of Atlanta, Georgia; diocese of Des Moines, Iowa; first communicants; diocese of Great Falls-Billings, Montana; archdiocese of Kottoyam, India; pilgrims; diocese of Springfield-Cape Girardeau, Missouri; archdiocese of Zamboanga, Philippines
Writings
E Supremi: On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in Christ, 4 October 1903
Ad Diem Illum Laetissiumum: On the Immaculate Conception, 2 February 1904
Iucunda Sane: On Pope Saint Gregory the GreatL, 12 March 1904
Acerbo Nimis: On Teaching Christian Doctine, 15 April 1905
Il Fermo Proposito: On Catholic Action in Italy, 11 June 1905
Vehementer Nos: On the French Law of Separation, 11 February 1906
Tribus Circiter: On the Mariavites or Mystic Priests of Poland, 5 April 1906
Pieni L'Animo: On the Clergy in Italy, 28 July 1906
Gravissimo Officii Munere: On French Associations of Worship, 10 August 1906
Une Fois Encore: On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6 January 1907
Lamentabili Sane, 3 July 1907
Pascendi Dominici Gregis: On the Doctrine of the Modernists, 8 September 1907
Communium Rerum: On Saint Anselm of Aosta, 21 April 1909
Editae Saepe: On Saint Charles Borromeo, 26 May 1910
Iamdudum: On the Law of Separation in Portugal, 24 May 1911
Lacrimabili Statu: On the Indians of South America, 7 June 1912
Singulari Quadam: On Labor Organizations, 24 September 1912
Haerent animo
Lamentabili sine exitu
Sacra tridentina Synodus
Tra le sollecitudini
Readings
Truly we are passing through disastrous times, when we may well make our own the lamentation of the Prophet: "There is no truth, and there is no mercy, and there is no knowledge of God in the land" (Hosea 4:1). Yet in the midst of this tide of evil, the Virgin Most Merciful rises before our eyes like a rainbow, as the arbiter of peace between God and man.
Pope Saint Pius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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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could have given us the Redeemer of the human race, and the Founder of the Faiths in another way than through the Virgin, but since Divine Providence has been pleased that we should have the Man-God through Mary, who conceived Him by the Holy Spirit and bore Him in her womb, it only remains for us to receive Christ from the hands of Mary.
Pope Saint Pius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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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hope is in Christ, who strengthens the weakest by His Divine help. I can do all in Him who strengthens me. His Power is infinite, and if I lean on him, it will be mine. His Wisdom is infinite, and if I look to Him for counsel, I shall not be deceived. His Goodness is infinite, and if my trust is stayed in Him, I shall not be abandoned.
Pope Saint Pius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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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the storm rage and the sky darken - not for that shall we be dismayed. If we trust as we should in Mary, we shall recognize in her, the Virgin Most Powerful "who with virginal foot did crush the head of the serpent."
Pope Saint Pius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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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 Communion is the shortest and safest way to Heaven.
Pope Saint Pius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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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lection of psalms found in Scripture, composed as it was under divine inspiration, has, from the very beginnings of the Church, shown a wonderful power of fostering devotion among Christians as they offer "to God a continuous sacrifice of praise, the harvest of lips blessing his name." Following a custom already established in the Old Law, the psalms have played a conspicuous part in the sacred liturgy itself, and in the divine office. Augustine expresses this well when he says: "God praised himself so that man might give him fitting praise; because God chose to praise himself man found the way in which to bless God."
The psalms have also a wonderful power to awaken in our hearts the desire for every virtue. Athanasius says: "The psalms seem to me to be like a mirror, in which the person using them can see himself, and the stirrings of his own heart; he can recite them against the background of his own emotions." Augustine says in his Confessions: "How I wept when I heard you hymns and canticles, being deeply moved by the sweet singing of your Church. Those voices flowed into my earts, truth filtered into my heart, and from my heart surged waves of devotion."
Indeed, who could fail to be moved by those many passages in the psalms which set forth so profoundly the infinite majesty of God, his omnipotence, his justice and goodness and clemency, too deep for words, and all the other infinite qualities of his that deserve our praise? Who could fail to be roused to the same emotions by the prayers of thanksgiving to God for blessings received by the petitions, so humble and confident, for blessings still awaited, by the cries of a soul in sorrow for sin committed? Who would not be fired wiht love as he looks on the likeness of Christ, the redeemer, here so lovingly foretold? His was "the voice" Augustine heard in every psalm, the voice of praise, of suffering, of joyful expectation, of present distress."
from the apostolic consititution of Pope Saint Pius X on Sacred Scri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