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Dedication of Saint John Lateran
Basilica San Giovanni in Laterano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라테라노에 대성전을 세워 봉헌한 것을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따르면 12세기부터, 바로 오늘(11월 9일) 이 기념 행사를 해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로마에서만 이 축일을 지냈는데, 나중에 로마 전례를 거행하는 모든 교회가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인 이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여,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기록한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서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축일:10월17일.게시판142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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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 살기를 바라십니다.
성령 안에서 열심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의 참된 성전입니다.
Basilica San Giovanni in Laterano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서기까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모든 성당들의 어머니였던 이곳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요 로마의 주교좌 성당(Catedrale)이기도 하다.
성당은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에 의해 공인되자
교황 멜키아데가 교회를 일으키고 또한 교황들의 관저로 사용하기 위해 짓기 시작한 것인데 이를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근처의 병영과 풀라우지 라테라노(평민 가문으로서 집정관을 지냈으며
이 일대의 소유지를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기증함)의 소유지인 이곳을 기증했다.
<라테란 성당>이라는 명칭이 이에서 비롯되었음은 물론이다.
처음 성당은 구세주인 그리스도에게 헌정되었으나 여러번 손상을 입어 오다가
896년에는 드디어 지진으로 붕괴되는 불운을 겪는다.
결국 905년에 다시 개축을 본 성당은 이후로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의 두 성자에게 바쳐지는데
특기할 것은 이곳에서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 Boniface VIII, 1235-1303. 재위 1294-1303)에 의해
사상 처음으로 성년의 선포를 보게 된 것이다.
1307년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간 후로 성당은 거의 방치상태에 놓이게 되고
1308년과 1360년에는 또다시 화재까지 입는 비운을 당한다.
그러다가 교황 인노센트 10세(Innocent X, 재위 1644-1655)때
1650년의 성년 행사를 앞두고 그 준비로 보르미니에게 개축을 명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의 성당 정면은 알렉산드로 갈릴레이의 작품인데 꼭대기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제자들과 교회 박사들의 상이 서있고 내부의 현관 왼쪽에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의 대리석 상이 모셔져 있다.
길이가 130미터나 되는 내부는 그리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대신 장엄, 엄숙한 맛을 전해주고 있다.
중앙 제단은 특히 <교황의 제단>이라 불려 지는데 여기에는 성 베드로가 예배를 보던 테이블이 보관되어 있다.
때문에 이 제단에서는 오직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단 바로 위 천개에는 은을 입힌 성 베드로(오른쪽)와 성 바오로(왼쪽)의 흉상이 모셔져 있고
제단 밑에는 교황 마르티노 7세의 무덤이 있다.
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양쪽 벽으로는 알렉산드로 알가르디의 작품이 부조되어 있는데 내용은
신약성서(오른쪽)와 구약성서(왼쪽)의 일화들이다.
이 위에는 다시 선지자들의 초상이 있고 그 밑의 벽감들 속에는 장엄한 규모를 띤
열 두 사도들의 대리석상이 들어 있는데 이는 건축가이며 조각가인 보르미니의 설계에 의한 것이다.
성당의 후진(Abside)을 압도하고 있는 거대한 모자이크화는
야고보 또리티와 야고보 다 까메리노의 작품으로 1288년과 1294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리스도교의 신자 생활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매우 깊다.
희년의 문
성당에는 또한 사상 처음으로 성년을 선포하는 교황 보니파시오의 모습이 담긴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성당으로 돌면서 오른쪽 첫 벽 기둥위의 벽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지오또의 작품이다.
이 외에도 성당에는 13세기 초에 지은 부속 수도원이 딸려있다.
라테라노 대성당 - 도메니포 폰타나. 1585-1590년. 인그레이빙
로마의 4대 성당의 하나로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로마의 라테라노 궁전에 인접한 최초의 바실리카식 대성당이며 성 조반니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 성 멜키아데스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증 할 때 함께 세워 준 성당으로,
324년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에 의해 구세주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그리스도교의 으뜸 교회가 되었다.
1307년 교황이 아비뇽으로 옮겨갈 때 까지 역대 교황의 주거지였으며
이곳에서 대관식,착좌식을 했고 이곳에 묻혔습니다
전세계 카톨릭 교회의 총본산으로, 로마의 4대 성당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바티칸의 산 피트로 성당(성베드로성당)보다 격이 높고 치외법권이 인정되고 있다.
896년에 지진으로 파괴됐다가 1838년에 재건되었고,
원래 이 곳에 있었던 초기 그리스도교 유물들은 모두 바티칸 박물관에 옮겨졌다.
이곳에서는 신, 구교 일치를 위한 라테라노 공의회가 1123, 1139, 1179, 1215년과 1512년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다.
이곳에는 1851년에 복구된 교황의 권좌가 있으며, 위에는 최후의 만찬때 사용 된것으로 전해지는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이 사용했던 낡은 나무 제대가 보존돼 있다.
중앙 교황 제대의 천개 양식은 15세기의 고딕 양식이다.
여기에는 성 바오로과 베드로의 머리 및 카타콤바에서 가져온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교황 마르띠노 5세의 무덤을 이 제대 앞에 둔 것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묶여 채찍질당하시던 기둥을 옮겨온 공적 때문이라고 한다.
제대 왼쪽에 성체를 모시는 경당이 있었는데,
그곳에 예수께서 최후만찬에서 사용한 식탁이 보존되어 있어,
성 목요일에 교황이 집전하는 만찬 미사는 이곳에서 봉헌된다.
요한 대성당은 1304년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이 옮겨갈 때까지 1천년 동안 교황청으로 사용되었으므로
’교황의 성당’ 이라고 불리며,성당에 부속되어 있는 라테라노 궁전은 1843년 교황 비오 11 세에 의해
예술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의 라테라노 조약도 이 궁전에서 체결되었다.
Legend of St Francis: 6. Dream of Innocent III-GIOTTO
1297-99.Fresco, 270 x 230 cm.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생활양식’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엄격하다하여 인가를 거절하였으나,
그날밤 꿈에 쓰러져가는 라테라노대성당을 작은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것을 보고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교회를 쇄신 시킬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회칙과 회를 구두로 승인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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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콘스탄티누스 축일:5월21일,게시판1773번.
*성녀 헬레나 황후 축일:8월18일.게시판1320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당 오른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의 명령을 받고 돌아가시던 날
몇 번씩이나 모욕과 고통을 받으며 오르내리셨다는 전설이 담긴
스칼라 산타라는 28층계로 된 계단이 있다.
많은 신자들은 여기에서 무릎을 꿇고 깊은 존경을 바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단은 콘스탄티노 황제의 어머니였던 성녀 헬레나가 로마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San Giovanni in Laterano
현재의 건물은 1649년에 완성된 바로크 양식으로 입구 쪽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상과
높이 6m의 그리스도 상, 성인들의 상이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교황의 거소로 사용되었던 라테라노 궁전이 교회에 인접해 있는데
궁전 앞 예배당은 스칼라 산타 Scala Santa성스러운 계단이라고 불린다.
432∼440년에 건립한 것으로, 모자이크와 상감세공(象嵌細工)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1646∼1650년에 F.보로미니가 전면적으로 개장(改裝)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성당은 콘스탄티노 황제가 희사한 땅으로 밀찌기
아레 교황(311∼314)이 세운 것이라 한다.
성당을 짓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콘스탄티노 황제의 둘째 부인이며
마쎈지오의 누이동생인 파우스타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마쎈지오의 막강한 힘으로 세워진 이 성당은 중앙부가 이중의 기둥으로 만들어져
구세주 그리스도, 세례자 요한, 선각자이며 제 4복음서를 쓴 사도 요한에게 봉헌되었다.
콘스탄티노 대성당은 455년 반달족의 침입으로 빼앗겼다가 후에 성 레오 교황 때 다시 되찾았다.
그러나 896년에 지진으로 파괴됐다가 905년에 세르지오 3세 때 재건되었다.
그후 니콜로 4세 때에 와서 많은 단장과 장식을 했으나
1308년과 1361년 사이에 두차례 걸쳐 화재로 소실됐다가
우르바노 5세와 그레고리오 11세 때 각각 재건된 수난의 건물이기도 하다.
정면은 클레멘테 12세 때 복구된 것으로 로마예술의 극치라고 불리울 만큼 훌륭한 모습을 하고 있다.
레오네 13세 때 동쪽 끝 반원형 부분을 복구하기 시작해서 1885년에 완결을 했다.
정면은 알렉산드로 갈릴레이의 작품으로 커다란 돌기둥에 의해 아치형으로 구분돼 있다.
지붕 위에는 14명의 사도와 성인들이 십자가를 들고 계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는 조각이 있다.
내부는 중앙부와 이중의 기둥으로 돼있고 천장에는 팔을 넓게 편 교황의 조각이 있다.
중앙부 12개의 정교한 돌기둥과 성상은 보로미니의 설계로 된 것이고
그 윗부분의 신약, 구약의 장면을 묘사한 조각은 1659년 알렉산드로 알가르디의 설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양쪽 측면부는 클레멘테 8세 때 완전히 개조한 것으로 이것은
쟈코모 넬라 포르타와 카발리에레 다르피노의 작품이다.
제대 아래는 시모네 기니가 만든 마르티노 5세의 무덤이 있다.
성체실과 끝부분은 1288년과 1294년 자코포토리티와 자코포 다 카메리노가 조각한 것으로
윗 부분에는 구름 위에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중앙에는 4복음을 상징하는 강가에서 갈증난 양과 사슴에게 물을 주는 모습이 있다.
그밖에도 프레스코는 조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고 1300년에 성년을 선언한 보니파치오 8세 상과
마르티네쯔 추기경 기념관과 오른쪽에 있는 카사티 추기경의 무덤은 이사이아다 피사의 걸작품들이다.
조각들 가운데서 코르시니성당은 갈릴레이의 작품이며 이 부속성당에는
안또니오 몬따우티의 삐에타상이 있다.
성당 앞에 있는 성 죠반니 광장에는 440년 시스또 3세가 새로 짓고
1637년에 우르바노 8세가 지금의 모양으로 다시 지은 성세소가 있다.
광장 중앙에는 이집트의 화강암으로 된 첨탑이 솟아있다.
이 화강암은 콘스탄티노 2세가 이집트의 테베에서 배로 실어온 것이다.
이 첨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것으로 높이가 기초를 포함해서 47m나 된다.
원래 이것은 막시모 원형 경기장에 방치돼 있던 것을 시스또 5세가 이리로 옮겨와 1588년에 복원해서
라테라노 성당 앞에다 세운 것이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12월27일.게시판814번,1540번.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6월24일.게시판1238번,1836번.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 복자품에 올라
-바티칸 대성전 광장 30만명 모여 ’축하’
[바티칸시티=외신종합]평화신문에서
마더 데레사가 복자품에 오르던 19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광장에는 30만의 인파가 운집, ’빈자들의 어머니’
’살아 있는 성녀’ 데레사 수녀의 시복을 축하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데레사 수녀 시복식을 자신의 교황직 25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행사로 거행함으로써 데레사 수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드러냈다.
데레사 수녀의 시복 선언문을 낭독한 교황은
마더 데레사가 선종한 9월5일을 데레사 수녀 축일로 기념할 것을 선포했다.
그 순간 베드로 대광장에 모여든 30만여명의 군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로써 교황은 교황직 25년 동안 복자 1319위를 탄생시켰다.
시복선언문 낭독 후 인도 전통 무용과 음악 공연이 이어지고,
시복시성식에서 복자나 성인의 유해 일부를 봉헌하는 관례에 따라
사리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마더 데레사의 혈액을 제단에 봉헌했다.
이 유해는 20일부터 라테라노 대성전에 보관됐다.
♬Christus Vincit.그리스도의 승리-스트라스부르크대학교 남녀혼성
Dedicazione della Basilica Lateranense
9 novembre - Festa
Venne costruita verso il 314 circa da papa Melchiade nei terreni donati da Costantino accanto al Palazzo Lateranense. Fu definita “Chiesa madre di tutte le chiese dell’Urbe e dell’Orbe”, distrutta piu volte e altrettante fatta ricostruire. E’ il simbolo della fede dei cristiani nei primi secoli, che sentivano la necessita di riunirsi in un luogo comune e consacrato per celebrare la Parola di Dio e i Sacri Misteri.
Chiese ancora il prefetto Rustico: "Dove vi riunite?". Giustino rispose: "Dove ciascuno puo e preferisce; tu credi che tutti noi ci riuniamo in uno stesso luogo, ma non e cosi perche il Dio dei cristiani, che e invisibile, non si puo circoscrivere in alcun luogo, ma riempie il cielo e la terra ed e venerato e glorificato ovunque dai suoi fedeli" (Atti del Martirio di S. Giustino e Compagni). Nella sua franca risposta, il grande apologeta S. Giustino ripeteva dinanzi al giudice quel che Gesu aveva detto alla Samaritana: "Credimi, donna, e giunto il momento in cui ne su questo monte ne in Gerusalemme adorerete il Padre. Voi adorate quel che non conoscete, noi adoriamo quel che conosciamo, perche la salvezza viene dai Giudei. Ma e` giunto il momento, ed e questo, in cui i veri adoratori adoreranno il Padre in spirito e verita; perche il Padre cerca tali adoratori. Dio e spirito, e quelli che lo adorano devono adorarlo in spirito e verita" (Gv 4,21-24).
La festa di oggi, della dedicazione della basilica del SS. Salvatore o di S. Giovanni in Laterano, non e certamente in contrasto con la testimonianza di S. Giustino e con la parola di Cristo. Salvi infatti il dovere e il diritto della preghiera sempre e dovunque, e anche vero che fin dai tempi apostolici la Chiesa, in quanto gruppo di persone, ha avuto bisogno di alcuni luoghi in cui riunirsi a pregare, proclamando la Parola di Dio e rinnovando il sacrificio di morte e risurrezione di Cristo, in attuazione delle Sue parole: "Prendete e mangiatene tutti; Prendete e bevetene tutti; Fate questo in memoria di me". Inizialmente queste riunioni venivano fatte nelle case private, anche perche la Chiesa non godeva ancora di alcun riconoscimento. Ma questo dovette venire abbastanza presto: c’e un singolare episodio all’inizio del secolo III, quando Alessandro Severo diede ragione alla comunita cristiana in un processo contro degli osti, che reclamavano contro la trasformazione di un’osteria in luogo di culto cristiano. La Basilica Lateranense venne fondata da papa Melchiade (311-314) nelle proprieta donate a questo scopo da Costantino di fianco al Palazzo Lateranense, fino allora residenza imperiale e poi residenza pontificia. Sorgeva cosi la "chiesa-madre di tutte le chiese dell’Urbe e dell’Orbe", distrutta e ricostruita molte volte. Vennero celebrati in essa o nell’attiguo Palazzo Lateranense (ora sede del Vicariato di Roma) ben cinque concili, negli anni 1123, 1139, 1179, 1215 e 1512. "Ma il tempio vivo e vero di Dio dobbiamo esserlo noi", dice S. Cesario di Ar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