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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성지











 


축일:9월9일(9월8일)
복녀 세라피나 스포르자
Beata Serafina Sforza (Sveva Feltria) Clarissa
(Urbino, 1434 - Pesaro, 8 settembre 1478)
Bl. Serafina Sforza
Born :1432 at Urbino, Italy as Sueva
Died: 8 September 1478 at Pesaro, Italy of natural causes;
body exhumed several years later, and found to be incorrupt;
entombed in the cathedral at Pesaro
Beatified: 17 July 1754 by Pope Benedict XIV (cultus confirmed)


 


복녀 세라피나 스포르자는 1434년(1432년) 이태리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1478년 선종하였다.
1754년 베네딕도14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몬테펠트로의 백작 딸로서 이탈리아의 우르비노(Urbino)에서 태어난 그녀는 수에바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어릴 때에 부모를 여의었다. 그 후 그녀는 삼촌인 콜론나 왕자 집에서 자랐고, 16세 때에는 페자로(Pesaro)의 알렉산데르 스포르차 경과 결혼하였다. 이 사람은 두 자녀를 둔 홀아비였으나 그녀와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한번은 그녀가 친정에서 머무는 동안에 남편이 파치피카란 여인과 지냈다. 세라피나는 온갖 수단을 강구하였으나 수포로 끝나자 이를 포기하고 오로지 기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결국 남편은 그의 아내를 집에서 내쫒았다. 그래서 그녀는 클라라회에 들어가서 세라피나라는 수도명을 받고 엄격한 회개생활을 시작하니 그녀의 덕은 날로 높아만 갔다. 그러던 중에 남편은 죽었다. 그녀가 수녀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25세였고, 20년 동안 회개생활을 하였다.
(가톨릭홈에서)



 


제주성글라라수도회 홈에서


 


우리 수도회의 영성
성 클라라 수도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클라라 수도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리며,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를 이루고 있다.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의 정배가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가족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을 살아가는 봉쇄 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성자를 당신 마음에 꼭 들어하시는” 성부와 함께 산 위에서 관상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마태 17,5)를 본받아 증거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찬미와 감사는 성체신비의 거행에서 절정을 이루며, 교회의 심장 역할을 다한다. 이로써 교회는 이 생명의 샘에서 한없이 새로워진다.
이렇게 자매들은 자신의 삶 전체로 온 누리의 찬미를  수행하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그 영광스러운 몸의 연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가 된다.


 


▒ 복음적 교회생활
성녀 클라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절대 순명하며 교회에 종속됨을 근본가치와 이 성소의 주춧돌로 삼았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맥박이며 교회를 존재케 하고 유지시켜주는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이 공동체생활의 중심을 두고 있다. 교회의 딸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이 성체성사를 통해 한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으로 그의 신비체인 교회의 전 지체와 일치함으로써 교회를 지탱시켜 나아가고, 특히 나약하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지체들의 보조자로서 영적 봉사를 하는 것이 본회의 주요 소명이다. 이에 교회에 충성함으로써 교회의 어느 지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교회정신과 완전히 일치하여 복음을 생활함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 복음적 형제애
성녀 클라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울삼아 상호 형제적 일치를 깊이 보존하며 복음 이상의 완성을 향해 나아감을 핵심으로 삼았다. 또한 이 심오한 자매적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전 공동체가 하나되어 전 지체, 교회에 형제애 일치의 표징이 되고 활력을 주며, 이로써 누리는 기쁨은 복음적 생활의 결실이며 참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자매애 안에 복음 정신은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리스도 사랑 안에 모두 하나되는 구원의 신비를 실현하게 된다.


 


▒ 복음적 가난
성녀 클라라에게 복음적 생활은 성령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절대적 가난의 생활이다. 가난은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법에 의한 복음적 가난이다. 즉 구유에서 가난하게 나셨고, 십자가 위에서 맨 몸으로 달리신 가난한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생활로써 따름이 본 회의 영성에 근본을 이룬다.


순례자로서 단순과 겸손으로 온전히 주님께 의존하며 기쁜 마음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 작은 자의 생활이다. 즉 모든 것은 은총이며 하느님의 선물임을 의식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가난. 겸손)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성령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된 참된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 안에서 늘 감사하는 참된 의미의 복음적 가난이다.


 


▒ 복음적 관상생활
성녀 클라라의 복음적 생활양식은 관상이다. 봉쇄된 수도원 안에서 깨끗한 마음과 주님의 정신으로 철저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고요와 침묵의 기도 생활에 있어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는 이 고요와 관상적 고독의 모범이다. 관상 중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뵈옵고 추구하는, 특히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의 신비를 묵상하며 이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모든 것 위에 감사하며 기쁨과 평화 중에 끊임없는 찬미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본 회의 사도직이며 이는 하느님의 영원한 만민 구원계획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상생활은 교회가 그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본질적 표징이 된다.


 


▒ 활동분야
우리의 사도직은 관상생활이며, 사도적 활동은 없다. 자급자족을 위한 한 수단으로 봉쇄 구역 안에서 소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나눔의 실천이며, 인근 주민과 같은 형태의 육체적 노동을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정신에 따라 택한 서민적 생활 수단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안에서 이 육체 노동은 낮은 자들의 수고를 함께 하는 것이며 고통 당하고 굶주리며 억압 당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함께 실생활로써 이 낮은 자되는 어리석음을 받아들여 창설자의 정신으로 복음적 가난과 단순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지향적 삶은 육체적 노동에서뿐 아니라 각자의 소임과 고유한 분야 안에서도 한 맥이 되어 기도와 침묵으로 살아 움직인다.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성녀 클라라에게 허가한(1228. 9. 17.)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하느님의 종들의 종 그레고리오 주교는 아시시 교구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적 공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애하는 딸들인 그리스도의 시녀들, 클라라와 그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강복을 보내노라.


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세속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였소.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떠한 재산도 결코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2. 이러한 그대들의 결심은 어떠한 물질적 곤란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은 임의 왼손이 머리 받쳐 도와 주실 것이기(참조: 아가 2,6; 8,3) 때문이오.


3.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참조: 마태 6,26) 들의 꽃들을 입히시는(참조: 마태 6,26)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게 보살펴 주실 것이며, 그분을 마주뵈올 영원의 나라에서는 당신 바른손으로 그대들을 안아주시고(참조: 아가 2,6; 8,3), 그분의 식탁에 자리한 그대들 사이를 오가며 손수 시중들어(참조: 루가 12,37) 주시리이다.


4. 이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극히 높은 가난에의 결심을 사도적 호의로 뒷받침하고 보증하며, 어느 누구도 그대들에게 재산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없게 이 문서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로 확인하는 바이오.


5.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인준하고 확인하는 이 기록을 훼손하거나 이에 대해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를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페루지아에서 교황 즉위 제2년 9월 17일


(제주성글라라수도회홈에서)


 


 


 



 


 


  ♬Brother Sun and Sister Moon


 


 


 


Beata Serafina Sforza (Sveva Feltria) Clarissa
8 settembre 
Urbino, 1434 - Pesaro, 8 settembre 1478


Scorrendo le alterne vicende della vita della beata Serafina Sforza, si evidenzia soprattutto un’ampia panoramica partecipativa della nobiltà italiana del Quattrocento, tante sono le Casate e dinastie coinvolte.
Sveva Feltria, appartenne all’illustre famiglia dei conti di Montefeltro, signori di Urbino dal 1234 al 1508 e che proprio negli anni in cui visse Sveva, divenne ducato sotto il fratello Oddantonio (1443). Nacque ad Urbino nella prima metà del 1434, ultima dei figli di Guidantonio e di Caterina Colonna nipote di papa Martino V.
Divenne orfana della madre nel 1438 e del padre nel 1443, essendo una bambina di nove anni, rimase per qualche tempo ad Urbino, prima sotto la tutela del fratello Oddantonio e poi dopo la tragica morte di questi, ucciso nel 1444 in una congiura, del fratello Federico di Montefeltro (1422-1482), celebre condottiero e mecenate dell’arte.
Nel marzo 1446 a 12 anni, lasciò Urbino, andando a vivere per più di un anno a Roma, presso lo zio materno cardinale Prospero Colonna, della celebre famiglia patrizia romana.
Lo zio, secondo gli usi del tempo, trattò il matrimonio della giovanissima nipote, con il quarantenne Alessandro Sforza, signore di Pesaro, che Sveva sposò per procura il 9 gennaio 1448, raggiungendolo solo il 1° settembre successivo.
Ma ben presto Sveva Feltria Sforza rimase sola; per gli impegni militari del marito chiamato nella guerra di Lombardia, a sostenere il fratello Francesco I Sforza (1401-1466) nella conquista del ducato di Milano, possesso poi riconosciutagli con la pace di Lodi del 1454.
Sveva, in sua assenza fu impegnata nei doveri dello Stato a Pesaro, assistita dalla zia Vittoria Colonna, dalla cugina Elisabetta Malatesta dei signori di Rimini, e inoltre nell’educazione dei figliastri Battista e Costanzo Sforza, figli di suo marito e della defunta prima moglie, Costanza Varano dei signori di Camerino.
La lunga lontananza e l’incuria del maturo consorte, impegnato solo nelle guerre e dedito ai facili amori, misero a dura prova i sentimenti e la fedeltà coniugale di Sveva.
Probabilmente cedette alle lusinghe di un cortigiano, per cui fu accusata di adulterio dal marito Alessandro Sforza, nel contempo fu incolpata anche di tentato avvelenamento del marito e di tramare contro di lui con la connivenza della zia Vittoria Colonna, dietro istigazione di Sigismondo Malatesta (1417-1468), al quale si cercava di restituire la signoria di Pesaro.
A parte le accuse formulate ingiustamente contro la moglie, Alessandro sempre più deciso di sbarazzarsene, tentò varie volte di avvelenarla e una notte cercò persino di strangolarla; soliti intrighi e delitti di corte, di cui sono pieni i resoconti storici della vita e delle successioni nelle varie corti europee, specie del Medioevo e secoli successivi.
Nonostante le difese dei parenti, l’infelice Sveva fu costretta dal marito e dal cognato Francesco duca di Milano, ad entrare fra le Clarisse del monastero “Corpus Christi” di Pesaro, dove dopo aver ottenuta la necessaria dispensa da papa Callisto III, fece la sua professione religiosa alla fine di agosto del 1457, prendendo il nome di suor Serafina.
Ritirarsi oppure far ritirare in un convento, era pratica abbastanza usuale fra le nobili, vedove, decadute, perseguitate, ecc., ma questo stato forzato di religiosa, fu per suor Serafina Sforza il trampolino di lancio verso una santità di vita, riscattando l’errore in cui era caduta per la giovanile inesperienza, ma ancor più a causa dell’ambiente corrotto, dove per sua sventura era capitata ancora adolescente.
Visse fra le clarisse di Pesaro 21 anni, nei quali seppe essere di esempio alle consorelle nella pratica delle virtù cristiane, nella carità, nell’umiltà e nell’assistenza agli infermi, tanto che nel 1475 a 41 anni venne eletta badessa.
Ebbe la consolazione di vedere il marito Alessandro, giungere al monastero del “Corpus Christi” per riconciliarsi con lei, riconoscendo i propri torti e tornare in seguito più volte a conversare con lei per la sua redenzione spirituale; Alessandro morì nel 1473.
Cinque anni dopo, l’8 settembre 1478, suor Serafina Sforza morì nel suo monastero di Pesaro a 44 anni, fra il cordoglio generale e pianta profondamente da tutte le clarisse, che ormai da anni la ritenevano una santa e che presero a tributarle quel culto, che poi fu confermato solennemente da papa Benedetto XIV il 17 luglio 1754, con il titolo di beata. La sua festa viene celebrata l’8 settembre.


Autore: Antonio Borrell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15-Feb-2006
 


 


SERAPHINA SFORZA
Also known as
Sueva Sforza
Memorial
9 September
Profile
Daughter of Count Guido Antonio of Montefeltro of Urbino, and Cattarina Colonna. Orphaned as a child. Grew up in the Roman villa of her uncle Prince Colonna. Married Duke Alexander Sforza, Lord of Pesaro, Italy at age 16 in 1448. After several happy years together, Alexander began to lead a dissolute life. He fell for a woman named Pacifica, had an affair, tried to poison Sueva, and finally kicked her out of the house in 1457. She joined the Poor Clares at Pesaro, taking the name Seraphina, and spending much of her time praying for Alexander's conversion. He eventually came to his senses and wanted Sueva back, but by then she had taken her vows. Twenty years a nun, elected abbess of her convent in 1475.
Born
1432 at Urbino, Italy as Sueva
Died
8 September 1478 at Pesaro, Italy of natural causes; body exhumed several years later, and found to be incorrupt; entombed in the cathedral at Pesaro
Beatified
17 July 1754 by Pope 0Benedict XIV (cultus confir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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