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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일기<제346호> / 2009. 11.9(월) / 흐리고 눈
"사장, 고마워요."
○…잠결에 대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만 바싹 들고 귀를 기울이니 조용했다. 왕청 생일집에 가신 리공근 아바이가 밤 늦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간밤에 순찰을 돌 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맞으며 웅크리고 서 계실 아바이의 흰 머리칼이 떠올라 이불 속으로 늘어진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현관 앞에 나가니 불을 켜고 작은 윤아바이가 앉아 있다가 깜짝 놀랐다.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가는 잠이 안온다며 나와 담배도 말아피시고, 가끔은 혼자서 술도 한잔하시곤 한다.
"어째 아직 안주무심까?"
연변식 질문에 평소 같으면 '잠이 안와요.'하고 '한국식 어미(語尾)'로 대답하실 윤 아바이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연변 사람들을 모든 말에 '~요'만 붙이면 한국말이 된다고 농담하곤 한다. 현관문을 따고, 방풍문을 따고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얼굴에 하얀 눈발이 느껴졌다. 대문 앞까지 가지도 않고 전등만 이리 저리 휘둘러 보았다.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현관문으로 다시 들어오니 윤아바이가 입을 열었다.
"사장, 나 피 흘렸어요."
"에?"
어깨를 움크려 조금은 기가 죽은 모습의 윤아바이의 발을 내려다 보니 엄지 발가락에 검은 피의 흔적이 묻어 있고, 옆에는 막대 걸레가 놓여 있었다.
"어쩌다 그랬슴까?"
"저 문에다가…"
유리문을 한번 돌아보고는 "좀 조심하시지…"하고는 사무실에 전등을 갖다 두고 2층으로 향했다.
어두운 계단을 올라오며 생각이 복잡해졌다.
'상처를 좀 보아 드리지…아니야, 빨리 자.…그래도 어르신들을 모신다는 놈이…졸려…요즘 봉사가 무엇인지 좀 알 것 같다며?…'
속을 살살 긁어놓는 또다른 나의 생각에 져서 마음을 고쳐 먹고 방에 돌아와, 연고를 하나 가지고 다시 내려갔다.
'연고나 좀 발라드리지, 뭐'
또다른 나의 생각이 반응이 없었다. 현관 앞에 나오니 불이 꺼져있고, 할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셨는지 안계셨다. 105호 방문을 삐끔히 열고 낮은 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잠깐 나오세요."
할아버지가 절둑거리며 나오셨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앉으세요. 약 좀 발라드릴게."
"아이, 일없어요."
시커먼 오른쪽 발을 앞으로 잡아 당겼다. 새끼 발가락에는 휴지가 둘둘 말려 있었다. 휴지를 떼어내야 약을 바르겠는데, 손가락 두 개 만으로 휴지를 풀어내려니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잘 씻지 않은 발가락 사이에 피가 엉겨 붙어 손가락이 자꾸 핀셋처럼 일어섰다.
'임마, 요즘 봉사가 뭔지 좀 알 것 같다며?'
또다른 나의 생각이 또 속을 긁었다.
남의 발에 봉사한다는 것은 가장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일하고 돌아온 가장의 발을 따뜻한 물로 씻어주던 중국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면서 중국의 평등하다는 부부 관계의 이면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는 흔한 발 안마를 받을 때면 미안한 마음이 앞섰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도 겸손한 자세로서의 봉사를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사무실에 들어가 비치하고 있던 약품들을 꺼내왔다. 바닥에 주저앉아 한손으로 발을 덥썩 붙잡고 알콜로 썻어냈다. 아무래도 연고만 살짝 바를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연고를 두텁게 바르고 가제를 길게 잘랐다.
"됐어요. 요고 하나만 붙이면 돼요."
할아버지가 미안한지 일회용 반창고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아, 잠깐 계세요."
퉁명스럽게 쏘아주며 가제를 좀 더 길게 잘랐다.
"피가 한량은 나왔을거예요. 사장 한테 올라갈까 하다가 자는 것 같아서…."
"그럼 이 시간에 자지 놀아요?"
내가 들어도 여전히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두 손으로 여전히 시커먼 발을 이리 저리 만지며 붕대를 감았다. 제법 응급처치사 같았다. 할아바지도 만족해 하시는 것 같았다. 검은 발에 하얀 붕대- 그렇게 잘 씻으라고 얘기해도 '아, 일년에 한두번 씻으면 돼요.'하신다.
"좀 조심하세요."
마찬가지로 시커먼 왼발에 묻은 피자욱을 씻어드리며 어느새 말투가 나긋나긋해졌다.
"예, 알았어요."
할아버지는 여전히 한국식 어미를 붙여 고분고분 대답하셨다.
약들을 챙겨 넣고 막대 걸레를 가져다가 여기 저기 닦다가 빼먹은 핏자국을 닦았다. 2층으로 돌아오며 손가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담배 한 대를 말며 말씀 하셨다.
"사장, 고마워요."
<346-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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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 화룡시/ 최요안OFS / joahnc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