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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로 본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환경부 정의

조회 수 4201 추천 수 0 2004.06.12 09:46:25
사례로 본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환경부정의

한 면 희 (환경정의포럼 공동운영위원장)


환경 재난은 산업사회의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연에서 자원을 추출하고, 그 자원을 원자재로 만들며, 이 원자재로 상품을 생산, 유통 소비하는 과정에서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데, 그 오염의 양이 자연의 자체 정화량을 넘어서는 정도로 자연에 농축되어 동식물 등 자연적 존재와 인간에게도 질병과 죽음을 가져다준다.

이에 상당수 환경단체는 야생 자연환경과 멸종에 처한 동식물을 보전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국한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렇게만 할 경우, 일정한 기간동안 일부 야생 자연환경과 동식물 보호에 성공적일 수 있어도, 자연 이용에 따른 이익과 불이익의 불공정성이 초래되는 사회적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자연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와 자연적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불이익과 고통이 쏠리는 부정의를 바로잡고자 할 때, 환경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 이것이 환경정의 접근이다. 물론 생태정의로 이행할 때, 정의의 눈으로 사회는 물론 자연까지 보게 되기 때문에 자연적 약자까지 보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장점을 갖게 된다.

오늘날 자연과 자원을 이용하는 데 따른 이익은 주로 유산계급과 백인, 남성, 선진국에게 돌아가는 반면, 피해와 불이익은 주로 사회적 약자와 자연적 약자에게 불공정하게 치우치고 있다. 1999년 한국에는 이런 것과 관련된 몇 가지 사례가 발생했다. 울산에서 발생한 모기마을 주민의 고통과 구미공단 동국합섬 노동자 정희양씨의 외이도선암에 따른 사망사건이 그런 것에 해당한다.

먼저 모기마을 사례를 살펴보자.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양면 오대마을과 오천마을은 울산에 공업단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오대마을의 김은곤 이장에 따르면, 마을 앞 샛강인 외양강에는 숭어가 뛰놀고, 물오리가 놀았으며, 장어와 게 등이 많이 잡혔던 곳이다. 그런데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거 강 건너편 울산에 공업단지가 들어서고 계속 확장되면서 점차 마을 주변의 생태계 여건에 변화가 초래되었다. 외항강은 죽어갔으며, 모기 발생의 진원지로 지목되고 있는 강 옆 저습지는 갈대가 자라면서 모기 서식처를 만들어줄 뿐인 죽음의 지역으로 변했다.

모두가 농사를 짓는 이곳은 늦은 봄에서 초가을까지 모기로 곤욕을 치루느라 주민의 생활이 피폐해졌다. 물론 강 건너편 화학공단에서 하루종일 일년내내 나는 굴뚝의 유독한 화학가스가 바람을 타고 실려와 주민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SK화학단지를 비롯한 공단이 들어서서 공장이 가동되는 과정에서 사용자는 이익을 보겠지만, 대대로 그 지역에서 농사짓고 살던 농민은 일방적으로 불이익만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인 탓에 자신들의 건강이 상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곳을 떠나자 못하고 있다. 다만 여러 관련 행정기관에 이주 대책을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지만, 정부와 자치단체는 선뜻 응해주고 있지 않다. 명백히 환경부정의의 사례에 해당한다. 이주를 시키지 않으려면 주민의 건강을 해치는 공단을 폐쇄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주민 이주를 단행한 연후에 환경의 질을 더욱 좋게 하는 각종 대책을 시행해야 한다.

또한 조금 나가면 장생포 초등학교가 있는데, 그곳은 삼면이 공단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곳에서 자라는 아이들 역시 사회적 약자층의 자녀인데, 주변의 공단에서 배출되는 유독가스를 마시면서 공부하고 뛰놀 것이다. 이 아이들의 건강을 진단한다면, 다른 지역의 아이들에 비해 중금속과 같은 물질에 더 많이 오염되어 있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조성되어 있는 여건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아이들에게 건강상의 위해를 가져다주는 것은 어른의 책임 유기이다.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좀 더 안전한 곳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환경정의에 바탕을 둔 정책 변화가 하루빨리 시행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가 불공정한 저울추를 다시 원상으로 되돌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될 것이다.

동국합섬(주)에 근무하다가 유해한 근로 여건으로 인해 외이도선암으로 죽은 정희양 사건도 공해산업에 의한 피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염려스러운 것이다. 10년간 동국합섬에서 근무하던 정희양씨(36)가 가장 열악한 여건의 2공장으로 전출된 것은 1997년 말이었다. 2공장은 스판덱스를 생산하는 곳인데, 기술조건이 좋은 다른 기업도 생산을 포기할 정도로 화학약품 등 유해한 작업을 많이 해야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일부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쉽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공장인 셈이다.

이곳의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는 종종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는 피부병에 걸리곤 한다. 정희양씨도 화공약품을 다루는 과정에서 코 속이 헐게 되는 것을 겪었고, 일상적으로 편두통을 느꼈으며, 쉽게 피로감을 느끼다가 마침내 1999년 2월 쓰러졌다. 특히 오른쪽 귀까지 몹시 아파서 병원서 정밀검사를 받던 중 희귀한 외이도선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을 통해 귀에서 뇌 속으로 이어지는 신경조직을 모두 제거했고, 뇌막과 우측 뇌를 들어냈으며, 우측 턱뼈의 관절을 잃게 되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음식도 먹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24시간을 수술했지만 뇌의 정맥까지 파고든 암세포 때문에 2개월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아 투병중 11월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인과 두 자녀를 둔 정희양씨가 산재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발병한 질병이야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산재 보상을 받아야 그나마 남은 가족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안전공단 산업안전연구원이 직업병 관련 전문가와 한국노총, 언론사 등 총 27명의 참관하에 역학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근로자 정희양에게서 발생한 외이도악성종양과 피부질환은 문헌고찰, 산업위생학적인 작업평가, 산업의학적 고찰 등을 통하여 볼 때, 작업과 관련하여 발생한 직업성 질환일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는 보고서를 내놓은 데 따른 것이었다.

역학조사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학조사는 가급적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정희양씨의 희귀 병은 객관적으로 그 직업 관련성을 입증하기 어려운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판정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역학조사에 의한 산재 판정은 최종적으로 가부 판정일 수밖에 없다. 직업 관련성이 높다면 가로 판정할 것이며, 관련성이 낮다면 부로 판정할 것이다. 이때 그 경계를 무쪽 자르듯이 분명하게 가를 수 없다. 어디까지가 가이고 어디까지가 부인지를 판정할 객관적 기준 자체가 없거나 애매모호할 것이다. 예컨대 유전자 변형 콩에 의한 유해성 여부는 성격상 단기적으로 직접 그 관련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토대로 미국 식품안전의약청은 무해하다고 속단하고 있다. 반면 유럽은 견해를 달리 한다. 유해 여부의 관련성은 장기적이고 간접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장기적이고 간접적으로 나타날 경우, 관련성이 적다는 이유로 무해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판단이다. 정희양씨의 경우도 유전자 콩 사례에 비해 마찬가지로 또는 더 억울한 것일 수 있다.

역학조사는 대체로 충분한 원인에 비중이 실리게 되는데, 그런 관점에서 유해하다고 알려진 작업장 여건이 정희양 질병의 충분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질병 발생에 필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령 정희양의 건강 상태 그대로 10여년간 동국합섬의 공장에서 근무하지 않고 다른 양호한 작업여건 (예컨대 전자산업계의 여건)에서 근무했다면 그에게 그런 참혹한 질병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고 답변할 수 있다면, 동국합섬의 작업 여건은 그의 질병 발생의 한 필요 원인이다. 물론 또 다른 필요 원인, 예컨대 그가 남보다 체질적으로 다소 약하다는 것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체질이 약하다는 원인만으로는 그 질병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업 여건은 필요 원인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따라 관련 가능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의 질병이 대단히 희귀한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현대 의학도 직업 관련성 여부에 관한 자료를 별로 확보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경우, 관련성이 낮을 가능성으로 귀착되고 산재 부적합으로 판정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판단은 이익을 보거나 강자의 입장에서 내려야 할 성질의 것인가? 그렇다면, 유전자 변형 콩과 관련해서 콩 수출로 이익을 많이 보는 미국의 판정에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 용의자의 무죄 관련성 여부가 적다고 해서 (즉 유죄 혐의에 대한 심증이 강하다고 해서), 명확한 물증도 없는데 유죄 판결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법의 정신은 약자 보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무죄 관련성 여부가 적어도 인권에 미치는 피해 때문에 범죄를 입증할 물증이 없다면 무죄 추정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약자 보호라는 같은 정신에 설 경우, 오히려 정희양 발병이 작업 여건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방도가 없다면, 약자에게 유리하도록 정도를 감안한 판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의 황금률 정신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약자의 관점에서 너그럽게 판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본래 정의의 정신이다. 정희양씨는 사회로부터 다소 억울한 대접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물론 정희양씨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슬기롭게 풀지 못했다. 그 까닭에 동국무역 노조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민노총 구미지역협의회의 도움도 받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대구지역 노동단체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문제를 구미공대의 학생에게 가져가 곧바로 전국민을 상대로 인터넷에 글을 띄운 것은 절차상의 과오였다. 가령 자신이 속한 노조와 민노총 구미지역협의회, 대구 노동단체의 순서로 자신의 문제를 의논하면서 단계적으로 풀어갔다면, 주변의 도움 속에 진실을 성공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같은 입장에 서게 될 다른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희양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산업사회에서 발생하는 것 가운데 정희양씨와 비슷한 성격의 질병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좁은 안목의 인간이 강자 관점에서 자연을 이 지경으로 망쳐놓았는데, 또 그 좁은 강자의 안목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1998년 한국이 IMF 상황에 놓여 있을 때, 환경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대표적 다국적 기업의 하나인 미국 듀퐁사가 바로 동국합섬 2공장을 인수할 것을 타진한 적이 있다. 정희양씨에 의하면, 이 당시에도 10여명의 간질환 환자가 있어서 듀퐁이 인수에 신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희양 사건이 작지만 사회 문제로 파급되자, 듀퐁이 더 소극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동자에게 돈벌이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해준다는 것으로, 노동자에게 유해한 산업을 존속시킬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동국노조 관계자는 한결같이 정희양의 입장에 서있기보다 회사측 입장과 견해가 같은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희양의 접근 방식과 관련되지만, 또 다른 요인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동국합섬은 부도로 인해 워크아웃 상태였다. 자체 회생이 되거나 아니면 외국 기업에 인수되어야 노동자들이 어려운 IMF 상황에서도 밥벌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국합섬노조가 정희양 한 사람보다 다른 많은 동료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생활을 염려했을 수 있다.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의 건강을 조금씩 쪼개어 팔더라도 우선은 가족의 끼니를 거르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환경정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약자가 당하는 대표적 유형의 고통이다.

이번 답사를 통해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나거나 해결된 것은 없다. 그러나 이번 답사가 일정한 정도로 환경정의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게 해주는 이점은 있다고 본다. 특히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 정의적 접근은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 것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부당하게 피해를 입은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탈자유주의 정의의 시각에서 약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가능한 환경 및 노동 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 사회 내에서 이런 사회적 약자 존중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자연적 약자 보호로도 그 정신이 이어져 진정한 의미에서 환경보전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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